이전 글에 썼던 것처럼 놀랄 일 없던 하루하루가 계속되던,
무료하고 평화롭던 나의 백수 일상에 변화가 일었다.
첫 번째는, 함께 일했던 다른 회사 동료분이 우연히 업계 지인들과 술을 마시다
대리 급 인재를 구한다는 소식에 무심결에 나를 추천한 것.
아직 일할 계획이 없지만 추천해준 건 고맙다며 간단히 답장을 보냈으나
생각보다 일이 진지하게 돌아갔고, 결국 그쪽에서 한번 더 '진짜 할 생각이 없느냐' 연락을 해왔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쿨하게 돌아섰더라도 상대방이 한 번 더 붙잡으면
없던 미련이 어찌나 끓어오르던지.
'그래..? 날 이렇게까지 원하다니.. 한번 만나는 볼까?'
하지만 정말로 나는 일할 생각이 없었기에 며칠만 더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웃기게도 같은 날, 함께 일했던 다른 회사 대표님이 요새 뭐 하고 있냐며
밥이나 한 끼 하자고 연락이 왔다. (이하 2번이라 표기하겠다.)
일 제안할 게 있다며 자세한 건 만나서 해준다고도.
'뭐야.. 둘이 짰어? 어쩜 둘이 같은 날에 나를 이렇게 뒤흔들어'
밥은 한 끼 할 수 있으니 만날 약속을 잡았다.
또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이 약속을 잡으니
고민하겠다고 했던 첫 번째 제안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졸지에 면접 두 건을 잡아버렸다.
물론, 각 잡고 보는 면접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잔잔한 백수 마음에 누가 돌을 던져 물결이 일었다는 뜻이다.
웃기게도 두 팀은 서로 같은 날을 불렀다.
어느 월요일 점심에 2번과 만나고 저녁엔 1번과 만났다.
2번은 나에게 프리랜서를 제안했다.
따로 또 같이 일하면서 건당으로 보수를 주겠다며.
앞으로 할 프로젝트와 대강 잡혀있는 일정을 알려줬다.
하지만 보수가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했고, 일정은 너무 촉박했으며,
무엇보다.. 같이 일해야 하는 사람이 싫었다. 아, 사람 이유 없이 미워하면 안 되는데.
어쩔 수가 없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사실 1번과 만나서는 '내가 프리랜서 제안을 받았는데,
그래서 상근직은 좀 힘들 것 같다'로 시작해서 딜을 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프리랜서 일은 별로였고, 기대 없이 만난 1번 사람들은 너무 멋졌다.
내가 원하던 프로페셔널함과 서로 믿고 의지하는 팀워크가 빛나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루는 프로젝트가 내가 이전에 혼자 하던 일들과 비교했을 때 엄청 컸다.
독립영화 대신에 마블 시리즈 같은 대형 상업영화를 하게 되는 셈이었다.
맘에 들었고, 욕심이 났다. 워라밸은 좀 없어 보였지만 젊었을 때 고생 좀 해보자 싶었다.
실은 이전 회사에서 일이 많아서 힘들었던 게 아니라 일이 없어서 힘들었던 거니까.
난 사실 쉬고 싶은 게 아니라 더 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면접에서 나는 오랜만에 사근사근 웃었다. 다 괜찮다고도 했다. 다 잘할 수 있다고도 했다.
부디 이 사람들이 나의 긍정적인 모습만 발견하고 좋은 결정을 내려주길 바라게 됐다.
이렇게 두 팀을 만나고 난 일주일 동안 신기한 감정의 변화를 겪었다.
2번에겐 심플하게 거절 의사를 보냈고 (감히 내가 거절 의사를 밝힐 수 있는 위치가 되다니 놀랍다)
1번의 연락을 기다리게 됐다.
이번 주 내로 연락을 주겠다는 그들의 약속을 계속 상기시키며,
월요일엔 '느낌이 좋아. 나 이 일 하게 될 거 같아. 어떡하지. 워라밸 없는 삶.. 나 자신 있나?'
화요일엔 '워라밸? 아직 사회초년생 주제에 뭐 50대 퇴직자 마인드를 갖고 있어. 기회가 왔을 때 잡자.'
수요일엔 '하 근데 면접에서 나 말 잘했나..? 나 혼자 고민하면 뭐해. 사실 확정된 것도 아닌데. 나 너무 김칫국 마시나..?'
목요일엔 '모르겠다. 연락이 안 오네.. 나 아무래도 아닌가..? 아냐.. 안 되면 뭐 어때. 전처럼 평화롭게 잘 살면 돼.'
금요일엔 '여보세요.. 네.. 담주 화요일이요? 네..! 괜찮습니다! 네! 그때 뵐게요~!'
그렇다. 금요일에 연락이 왔다. 다음 주 화요일에 한번 더 얼굴 보고 만나서 자세한 것들 얘기 나누자고 했다.
하. 이 정도면 나 이직이라는 걸 하는 걸까.
퇴사도 처음이었지만 이직도 처음이다. 새로운 회사라니. 신기해..
관심 없는데 한번 더 볼리가 없으니까.. 화욜에 얘기만 한 번만 더 잘하고 오자.
근데 한편으론 좀 아쉽다.
나 한 달밖에 안 놀았는데.. 그마저도 기억이 살아있을 때 이력서 업데이트한다며 컴퓨터 앞에 있었는데..
주어진 것이 12월 한 달뿐이라면.. 난 뭘 하며 놀아야 할까. (행복한 고민)
가차 없이 가버리는 백수 일상이 아수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