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랑달 Feb 11. 2021

흩어지는 도시의 시간을 영원한 신화의 입으로 읊조리다

운디네(2020), 크리스티안 펫졸드, 92분

※영화 〈운디네〉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넓은 의미에서 과거에 대한 기억과 경험이라고 정의했을 때, 사건을 설명한 서술 자료와 기록은 역사가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기록의 유한함은 빠뜨릴 수 없는 한계로 남는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란 집단기억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자기 집단이 이질적 집단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목격자의 증언에서 탐구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칠 때, 당대의 존재자는 단지 전달자의 역할보다 적극적인 탐구와 선별,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한 전문가가 된다. 그렇게 화자는 권위를 갖고, 역사는 특별히 엄선된 우아한 컬렉션이 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에게 기억이란 거대한 역사에 휩쓸린 개별 인간을 향한 연대의 음성이다. 유형의 인공물은 인간의 선택에 따라 언제든 붕괴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를 품어내는 방법이란 머리에서 입으로, 다시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는 영원성에서 비롯된다.

출처: 다음 영화



전작 〈트랜짓〉에서의 음성의 의도적인 왜곡과 충돌은 영화로 옮긴 역사의 현장에 균열을 가한다. 이미 죽은 작가 바이델이 남긴 소설은 게오르그의 것이 되고, 그의 여정은 식당 주인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타인의 목소리를 도용해 새로운 신분을 얻은 게오르그는 인간과 역사의 새로운 반환점에서 머무르다 지난 시대의 그림자로 사라진다. 그리고 극의 모든 설명의 몫을 주인공 대신 평범한 화자에게 넘긴다. 어쩌면 감독은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경유하는 주인공 게오르그와 마리에게 특정한 이름을 달지 않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전작에서 그는 전체주의나 난민처럼 현재 진행형인 소재 위 인간 보통의 감정과 본질을 결합한다. 여전히 유효한 시간을 지나치는 가상 인물을 다루는 만큼 관객은 그에 걸맞은 주체를 대입하곤 한다. 하지만 의도된 거리감은 영화의 전달에 적극적인 상상력을 주입하는 것을 지양한다. 그것이 전쟁이든, 정치든 간에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대입하다 보면 영화 곳곳의 상징과 비유를 해석하는 범주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가볍게 말하자면 성취를 드러내고 싶지만 내 신상이 공개되기는 원치 않는 감정과도 같달까. 과거의 전쟁과 현재의 난민 문제를 엮어낸 환경과, 알지 못하는 무형의 가치를 좇는 캐릭터 사이 이어질 듯 결합하지 않는 틈새를 관객은 영화 내내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스스로 발화할 수 없는 주인공을 기억하는 제삼자로부터 매개하여 역사와 사람을 말하는 이야기가 〈트랜짓〉이라면, 〈운디네〉말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소실된 역사의 시간을 알려준다. 게오르그와 마리의 드라마에는 은근하고도 자연스럽게 고통의 진실을 내면화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평범한 인물이라는 빈 용기는 감정과 기억을 촉매로 20세기와 21세기의 비극에 몸을 맡긴다. 그에 비해 운디네는 적극적으로 역사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관객이 기대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전복하는 영화는 익숙한 설화로 역사적 해석을 도모한다. 극 중 직업이 역사학자이자 도슨트인 것도 그렇다. 훔볼트 포럼에서 베를린의 역사를 설명하는 운디네는 여러 번 등장하는 장대한 설명과 함께 이제는 희미한 과거의 역사 위에 터 잡은 공간에서 홀로 선 연사처럼 보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겠으나, 그 주체가 오래된 전설 속 존재라면 그 의미는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설화 속 물의 정령은 유독 음성과 맞닿은 이미지로 전해져 온다. 이 미지의 생물은 항해 중 이어지는 알 수 없는 사고에 이유를 찾고자 했던 과거의 상상력으로 창조되었다. 신화적 존재에게 부여된 첫 번째 상상은 남성을 죽음에 이르는 악한 여성의 이미지다. 세이렌, 스킬라, 네레이스, 물의 요정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반인반어의 형상은 물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홀리는 젊은 여성으로 묘사된다. 바다를 지나는 선원에게 자신의 질문에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괴물로 변하거나,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홀려 배를 침몰시키고 생명을 앗아간다. 또 다른 상상은 인간이 되고 싶은 소망과 영혼의 성취, 좌절의 서사다. 영화의 모티프가 된 16세기 독일 작가 푸케의 동화 〈운디네〉에서 순수한 영혼의 님프 운디네는 인간인 훌트브란트와 사랑에 빠진다. 인간의 마음을 배우고 살아가려는 운디네를 버리고 다른 인간 여성에게 돌아가는 훌트브란트를 향한 분노와 슬픔은 살해로 이어진다.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은 이러한 신화의 모티프를 가져와 인간의 다리를 얻기 위해 목소리를 잃고, 왕자의 선택을 받지 못해 물거품이 되어 버린 ‘인어공주’ 아리엘을 창조했다. 이들은 인간의 영혼을 얻기 위해 남성과 결혼하는 서사로, 순종과 소망으로 시작했으나 그 결말은 다시 신화적 생물로 돌아가거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물의 정령의 서사적 해석에서 목소리는 인간(남성)을 죽이는 무기이자 성적인 매혹의 수단이다. 탐미와 위험을 동시에 지닌 대상화된 종속적 여성상은 이러한 여성을 대하는 양가적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감독은 영화에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고대부터 낭만주의 시대까지 사랑받았던 신화를 재해석한, 독일 작가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단편 〈운디네는 간다〉를 꼽았다. 이는 기존의 남성 서사 속 대상으로 존재하던 운디네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부여하는 출발점이 된다. 바흐만은 운디네 설화가 내포한 가부장적 서사를 뒤집는다. 기사 훌트브란트를 사랑했지만 결국 진정한 연인으로 선택받지 못한 물의 정령 운디네는 약혼자 베르탈다와의 결혼식장에서 그를 죽인다. 아름다운 여성의 순종적 사랑이 가져온 파국적 서사를 바흐만은 운디네의 독백에 주목한다. 텍스트의 전통적 서사에서 벗어나 일인 서술자의 독백만이 주를 이루는 소설은 운디네의 온전한 목소리로 기존의 서사를 해체한다.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현실 세계가 남성 중심의 부당함으로 가득 차 있음을 지적하며 종국에 이르러 물로 되돌아가는 행위가 사실은 운디네의 주체적 행위임을 강조한다. 남성의 언어와 사고로 묘사된 이질적인 여성의 상징인 운디네는 공고한 권력관계를 비난하며 자신이 남성의 공포를 방어하기 위한 표상이자 환상으로만 존재했다고 고백한다. 종래의 구조에서 말하기를 부정당하던 여성은 거품이 되거나, 남성 영웅에 의해 처단되는 대상으로 남는다. 하지만 소설 속 운디네의 고백, 그리고 영화의 운디네가 목소리를 내는 동안, 그의 설명은 베를린의 소멸한 역사를 감싸고 평범한 시민들이 채 쌓아 두지 못했던 집단기억을 꺼내놓으며 소실된 존재를 되살린다.



지금의 훔볼트 포럼이 지어진 베를린의 슈프레 섬 주변은 건축물의 공간 이상으로 도시의 역사와 기억의 소실점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과거 베를린 궁전부터 공화국 전당, 그리고 현재의 훔볼트 포럼까지 동일한 자리에서 수 세기 동안 짓고 부수기를 반복했던 지난한 역사가 그 자리에 담겨있다. 브란덴부르크의 한 가문이 소유했던 성에서 16세기 궁전의 칭호를 얻은 뒤 역사적 사건의 한가운데를 지키던 베를린 궁전은 프로이센 공화국과 독일 제국의 찬란한 역사를 상징했다. 근대에 들어서서 주변의 건물이 새로운 양식으로 바뀌어도 베를린 궁전만은 역사적 보존과 독일의 정체성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로 계속 남아 있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암울한 시기가 찾아왔고, 이후 히틀러와 나치의 광기 어린 전체주의 정치로 독일은 또 한 번의 전쟁을 맞게 된다. 그 과정에서 베를린 궁전은 일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어지러운 역사 속에서도 그 가치를 유지하던 궁은 냉전의 이데올로기에 두 쪽으로 나뉜 도시의 운명과 함께 퇴장한다. 사회주의 공화국의 새로운 정체성을 공포할 필요가 있던 정부는 인민을 주체로 한 투쟁의 공간이 필요했고, 1976년 궁전을 해체하고 새로운 공화국 전당을 건립한다. 이후 독일 통일까지 근 30년 간 문화와 사상의 공간으로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통일 후 석면 문제로 건물이 통제되고, 곧 정부의 철거 조치에 반발하는 기류가 형성이 된다. 하지만 이는 얼마 가지 않는다. 통일 이후 동독의 과거사 청산과 함께 공화국 전당의 역사는 곧 동독의 잔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 정부는 베를린 궁전의 복원과 함께 역사문화공간인 훔볼트 포럼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시민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흡수통일의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인 역사적 정체성은 다른 한쪽을 잠식하고 익숙한 이미지를 구축한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의 준거는 아니다. 이념과 사상의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과 역사 집단 간의 경쟁이라는 시간과 기억의 차원에서 바라보자는 거다. 공화국 전당의 삭제란 동독 주민의 사적 경험으로 자리 잡았던 표상이 국가와 권력에 의한 억압으로 볼 수 있다. 집단 기억을 상정하지 못한 시대적 상황에서 민족적 정체성의 부각은 애매한 위치로 존재했던 동독의 역사를 압도한다. 그렇게 과거 제국과 공화국의 영광을 대변하는 독일의 민족사와 그보다는 더 가까웠던 동독의 과거사 중 전자의 승리로 끝난 논쟁은 거대 권력의 역사가 개인의 기억을 지워버린 경험으로 남는다.


출처: Cinema of the World



운디네는 동독의 시민들이 그저 침묵을 종용받던 역사적 현장 안에서 그들의 상처를 대신해 말한다. 남성적 세계에서 억압의 대상이 되어 오랜 시간을 거친 운디네 역시 기억의 억압에 민감히 반응한다. 그래서 운디네가 내뱉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독일 공공건축의 상징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애초에 무의미한 문장으로 들린다. 건물의 기본이란 최소한 베를린의 역사에서 보자면 형태도 기능도 아닌, 그 모두를 통제하는 거대한 힘이 좌우하고 있다. 남성을 파괴하는 악녀로 불렸던 운디네는 전통적 문명에서 배제된 언어로 억눌렸던 기억을 치유한다. 운디네가 여러 남성과의 만남과 배반을 거쳐 최종적으로 물로 회귀하는 모습은 베를린 궁전, 혹은 공화국 전당으로 불린 건물의 운명과 중첩된다. 하지만 형체 없는 물처럼 영원히 인간의 기억에 맴도는 신화는 모든 역사를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는 불멸의 존재다. 따라서 가부장적 문명의 산물인 물의 정령이, 영화 속에서 자신의 음성으로 국가 체제에 휩쓸린 시민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장면은, 상처 받은 도시를 위한 신화의 연대와 치유의 과정이다. 권력의 언어에 저항하는 영원한 운디네의 언어는 논리와 사명으로 점철된 남성적 세계에서 억압받는 모든 이들을 향해 시대와 역사, 인간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의 저편에서 ‘그냥’ 주어진 행복의 다음 장을 넘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