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는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 시대극 전문 감독으로 평가될 이준익 감독의 열네 번째 신작이자 〈동주〉에 이은 두 번째 흑백영화다. 정약전의 책 자산어보의 서문에서 출발한 영화는 변화와 혼돈의 시기 속 거칠고도 꼿꼿했던 사람들의 삶을 관찰한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학을 연구하던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전은 1801년 신유박해로 동생 정약용과 함께 유배길에 오른다. 어쩌면 살아서는 마지막 모습으로 만날 두 사람은 각자 흑산도와 강진으로 흩어졌고, 정약전은 섬 살이 중 벗으로 만난 어부 장창대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도감 『자산어보』를 집필한다. 기약 없는 귀양살이에 지친 그의 눈앞에 펼쳐진 온갖 수산물에 대한 궁금증은 구체적인 사물과 현상의 분석을 중요시한 실용주의적 사고에서 나왔다. 영화가 거대한 역사로부터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않았던 개인을 주목했듯 정약전 역시 국가와 가치를 다룬 성리학에서 눈을 돌려 변화와 비판의식을 담아 평가절하된 존재에 애정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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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흑백의 색감만큼이나 선명하고도 확고한 서사적 대비로 관객을 집중시킨다. 전작 〈동주〉에서는 ‘동주’와 ‘몽규’의 닮았지만 서로 다른 이상과 행동을 대비하며 건조한 역사의 문장에 상상력을 더해 살아있는 이야기를 창조한다. 정약전과 창대 역시 사학과 성리학, 명문 사대부와 가난한 천민 출신, 스승과 제자, 이론과 실천 등 모든 면에서 달랐던 두 사람이 흑산도라는 공간에서 대립하며 충돌하다 서로의 삶을 인정하고 공유하는 사제이자 벗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성향에 따라 ‘자산어보의 삶’과 ‘목민심서의 삶’으로 갈라진다. 비슷한 귀양 기간 정약용은 지역의 유림과 정치, 사회. 경제, 법률 등 분야를 망라한 수백 권의 책을 집필했지만, 정약전은 소나무의 조세 징수나 표류 유람기 등 개별 사건을 다룬 책 몇 권을 썼을 뿐이다. 이는 두 사람의 서로 다른 가치관을 표현한다. 같은 실학사상의 주창자였어도 정약용은 신분과 계급, 왕과 천민이 나누어진 수직적 위계 사회를 지향했고, 정약전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계급과 성별, 직업을 뛰어넘은 수평 사회를 바랐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정약전의 삶을 재구성하면서 영화는 어느 한 사람을 미화하거나 영웅시하지 않는다. 대신 어떠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각자의 인식과 현실을 모두 그려내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닌 차이의 영역으로 영화 속 인물의 행동을 이해하게 만든다. 정약전의 뛰어난 학문적 능력과 지식을 지켜본 창대는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스승을 재촉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신념에 따른 그의 행동은 변하지 않는다. 열등감과 출세의 꿈을 펼치기 위해 스승을 등지고 흑산도를 벗어난 창대는 이론의 이상과 실제 현실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약전이 행했던 가치를 이해한다. 창대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수는 없다. 태생적 격차와 경제적 빈곤을 딛고 성리학이라는 당대의 정설로 세상을 바라봤을 그에게 입신양명의 꿈은 항상 지니던 열등의식을 타개할 절호의 기회였다. 마찬가지로 실학과 서학을 배우고 이미 사회의 부조리를 먼저 체험한 정약전의 관점에서 조선의 개혁은 필수 불가결했다. 그러나 이미 조정에 눈엣가시였던 정약전에게 15년간의 유배 생활은 그의 발목을 묶어두려던 계략의 일환이다. 이 또한 모르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상황에서 지켜야 할 가치를 정하고 이를 실천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정약전의 입장이 설득력 있지만, 시대상을 고려한다면 역사의 한 대목에서 고민과 갈등을 반복하는 인간의 삶이 남을 뿐이다.
상업 영화의 정석을 걷는 영화는 긴 이야기를 풀어내며 볼거리와 먹을거리, 재미 또한 놓치지 않는다. 먼저 눈을 사로잡는 것은 흑백 화면의 미묘한 농도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풍광과 의미다. 마치 고고한 수묵화 한 점을 감상하듯 관객들은 한반도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영화가 품은 시대성과 미학적 성취도 함께 체험한다. 색을 없애며 집중하게 만드는 영화의 디테일은 인물의 신념과 가치관을 흑백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유배지에서 지내는 동안 정약전은 오로지 거친 흰옷-색깔을 알지 못하므로 밝은 옷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만을 입고 지낸다. 떨어져도 기워 입은 흔적은 그의 강직하고도 올곧은 성품을 짐작한다. 헤지고 짠물에 절은 의복의 흑산도 주민들과 정약전의 대척점에 있는 육지의 관료와 사대부는 어둡고 짙은 옷으로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깔끔하고 티 없는 의복은 부의 불평등을 용인하는 부패한 사대부의 이미지와 어울린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목민관의 삶을 사는 창대의 옷이다. 그는 주류 사회에 편입되었어도 여전히 흰옷을 입어 그들과 거리를 만든다. 『목민심서』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창대의 강직함은 정약전을 닮아있다. 연줄과 비리로 ‘얼룩진’ 목민관과는 다른 삶을 살려는 그의 의지는 결국 미완으로 그쳤지만 여전히 흰옷을 버리지 않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과거의 거친 흰옷으로 갈아입는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고 最古의 수산학 연구서인 『자산어보』는 자체적 분류법을 활용해 세계 최초로 수산생물 계군 차이를 기록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박물학의 명저이다. 집요한 관찰력과 기록의 의지, 호기심의 산물인 책의 내용을 담은 영화답게 다양한 수산물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의 역동적인 모습은 흑백의 스크린을 뚫고 그 생명력을 발산하며, 이를 잡아 생계를 이어갔을 그 시대 민중들의 척박한 삶에 움트는 생의 의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수산물의 향연에 음식 장면이 빠질 수 없다. 가거댁이 정약전에게 차려주는 홍어와 문어 요리는 보는 이의 침을 고이게 한다. 희로애락을 포착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정약전의 유배 생활의 동반자 가거댁 역의 이정은 배우의 능청스럽고도 실감 나는 연기는 강약을 조절하며 시대극의 분위기를 이끈다. 흑산도를 벗어나고 싶은 관리 별장 역의 조우진 배우는 코믹 연기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창대의 어머니 역의 방은진 배우 겸 감독은 적은 비중에도 디테일한 연기를 자아낸다. 창대의 아버지로 등장한 김의성 배우와 나주 목사 역의 동방우 배우는 흡입력 있는 악역 연기로 긴장감을 높여준다. 거기에 민도희, 김준한, 강기영, 윤경호 배우의 호연과 봉만대 감독, 달시 파켓 평론가 등 익숙한 카메오를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만 영화의 아쉬운 점도 존재한다. 영화의 중후반을 넘어서며 창대가 뭍으로 나가 부패한 실상을 알아가는 과정은 감정적 호응을 자극하는 장면들과 인위적인 플래시 백의 반복으로 전체 흐름과 결이 맞지 않아 보인다. 정약전이 『자산어보』의 일부 내용을 읽는 보이스오버 장면 역시 창대와의 각별한 관계성과 영화 전반의 주제의식을 드러내 주지만 의도와는 달리 화면과 말의 조합이 직선적으로 흘러간다는 인상을 받는다. 잘 끌어왔던 흑백의 흐름을 깨뜨리는 어떤 씬은 사족으로도 보일만 하며 방해가 될 여지가 있다.
자산어보에서 시대를 앞서간 굳은 신념의 지식인은 정약전뿐만이 아니다. 감독은 역사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물을 놓치지 않았고, 그의 서사를 끌어올려 ‘창대’를 탄생시켰다. 시대의 혼란 속에서 주류적 삶을 버렸던 두 인물의 삶은 오늘의 관객에게 기억할 만한 영화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