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어비앤비 Feb 24. 2020

친절한 대만족(臺灣族) 덕분에 대만족(大滿足)

내 마음속 지니를 소환하다

어느덧 마흔. 젊음을 무기로 여자 혼자도 두려울 것 없다며 세 달씩, 일 년씩 짐을 꾸려 해외로 떠나곤 했던 20대의 패기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요술램프에 갇힌 지니 신세가 되어 있었다. 가끔 영국으로 순간 이동을 하는 꿈을 꾸지만 떠나고 싶은 갈망을 달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삶의 굴레 속에서 언젠가는 다시 떠날 수 있겠지라는 막연함이 길어지자, 내 마음속의 지니도 세상에 나오고 싶어 꿈틀대기 시작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굴러가는 일상을 벗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마음으로 찾은 일이 투어플래너였다.


여행에 대한 감도 회복하고 현지답사를 위한 첫 여행지로 2017년 당시 핫하던 대만을 선택했다. 뉴질랜드, 영국, 홍콩에 이어 대만까지 일부러 섬나라를 고르려던 것은 아니지만, 고향인 부산에서 바다를 보며 자라서인지 필연처럼 또 섬나라에 가게 되었다.


드디어 출국일이 밝았고, 16년 만에 한국을 벗어나 나의 여행 본능 깨우기에 돌입했다. 실로 오랜만에 받는 입국심사라 다소 긴장한 상태로 대만 이민관 앞에 섰는데, 지문 등록하는 과정에서 "다시"라는 한국말에 한순간에 긴장이 풀렸다. 20대만큼은 아니지만 나의 패기가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친절한 대만족(臺灣族) 대만족(大滿足)


▲ 도착 첫날부터 호된 비바람으로 맞아준 예류

수도 타이베이는 이미 여행정보도 많고 유명 관광스팟에선 한국인지 대만인지 헷갈릴 정도로 많은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어서 타이베이는 일단 가볍게 둘러보기로 했다. 그리고 덜 알려진 지역을 길게 돌아보는데 포커스를 맞췄다.


그래서 그 시작점으로 우리나라의 서울에서 대전 정도의 거리인 타이중으로 향했다. 타이중 버스터미널까지 직행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중간에 정차하는 버스였다. 점점 에어비앤비 숙소와 가까워지길래 버스기사님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여기서도 멈추어가는지 묻고 싶었는데 기사님이 영어를 못하셨다. 대만어를 못하는 나와 마찬가지로 고구마 수십 개 먹은 표정들이 오갔다.


펑지아 야시장은 알아들을까 싶어 말을 꺼내려는 순간 버스에 같이 타고 있던 대만인 중년부부가 나와 비슷한 수준의 생존 영어로 같이 내리면 된다고 말했다. 그 부부는 에어비앤비 숙소 위치를 확인하더니 다시 되돌아가야 한다고 일러줬다. 나는 얼떨결에 내려야 할 정류장을 그냥 지나버린 셈이었다. 여자 혼자는 위험하다며 택시를 함께 타고 이동해준 부부. 에어비앤비 숙소 앞에서 호스트와 통화를 한 뒤에야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말로만 듣던 대만 사람들의 친절을 몸소 느끼는 순간이었다.




감동의 첫 에어비앤비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제임스(James)는 두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나를 맞아줬다. 버스에서 만난 중년부부가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준 친절에 대만인인 제임스도 놀라워했다.

▲  내 주위를 맴돌며 호기심을 표현하던 냥이들

짐을 푼 뒤 제임스가 동네 산책을 제안했다. 편의점과 카페 그리고 식당 위치 등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대만 사람들이 조식으로 주로 먹는 또우장과 딴삥을 파는 식당으로 데려다줬다. 현지인처럼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첫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제임스처럼 세세하게 알려주는 친절한 호스트를 만난 것은 너무나도 큰 행운이었다. 제임스가 또 다른 현지 음식을 맛보게 해 주려고 다음날은 맑은 선짓국과 대만식 돼지고기 덮밥 루로우판을 파는 식당에 같이 가줬다. 평범한 동네 식당이었는데도 정말 맛있었기에 대만 음식에 대한 기대치가 급상승했다.

▲ (좌) 제임스는 샌드위치 나는 딴삥과 또우장 (우) 맑은 선지국과 루로우판 그리고 제임스의 추천 반찬

대만 음식 특유의 향 때문에 식사를 제대로 못했다는 사람들의 여행기를 읽고 혹시나 나도 입에 맞지 않을까 봐 캐리어 가득 한국 즉석식품을 챙겨갔었다. 하지만 대만 음식이 너무 입에 잘 맞아 모두 제임스에게 선물했다. 항상 나가서 사 먹거나 간단한 컵라면만 집에서 먹었다는 제임스에게 한국 즉석식품은 신세계였다고.


제임스가 취두부를 맛보게 해 주겠다고 해서 펑지아 야시장에 갔다. 가게문이 닫혀 있어서 다른 것을 맛보기로 했다. 아직 취두부에 도전하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던 나는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이미 춘수당에서 저녁식사로 공부면에 아이스블랙티로 배를 채운 뒤 제임스의 연락을 받은 터라 아무것도 못 먹을 줄 알았다. 그런데 파파야 밀크를 손에 쥐자 신기하게도 배속에 그만큼의 여유공간이 생겼다.

▲ 대학교 앞에 형성되어 젊은 층이 주 고객이던 펑지아 야시장

파파야 밀크를 마시며 야시장을 한 바퀴 돌고, 제임스와 나는 대만식 핫도그와 지파이를 포장해서 숙소로 돌아와 대만 맥주와 한라산 소주로 파티를 벌이기로 했다. 미처 냉장고에 들어갈 틈도 없이 마시게 된 소주. 안 그래도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술 마시는 장면이 많다고 실제로도 그런지 궁금해했던 순수한 제임스의 소주 첫 경험이 되었다. 소주에 익숙한 한국사람들 중에서도 소수의 마니아층만 즐긴다는 상온의 소주, 일명 노지(露地) 소주를 마셨으니 특히 강렬한 첫인상이었을 것이다.

▲ 혼자 주문하라고 했으면 무턱대고 찍었을 딴삥 맛집

제임스가 관광지인 일월담과 고미습지 중에서 한 곳을 데려다주겠다고 해서, 주말에 제임스의 여자 친구인 캐롤(Carol)과 캐롤의 친구 에밀리(Emily)까지 네 명이 일월담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유명한 딴삥 맛집에서 제임스가 김치 딴삥을 주문해줬다. 나는 영국에서 일 년 동안 김치 없이도 거뜬히 버틴 사람이지만 대만에서 먹는 달달한 김치 딴삥은 색다른 느낌이었다.

▲ 웃음이 끊이지 않던 제임스, 캐롤, 에밀리와의 즐거운 일월담 나들이

제임스와 함께 하는 시간들은 기승전 먹방이었다. 시장에서 다들 줄을 길게 서서 사 먹던 우유모찌, 철판에 구워주는 소시지 등. 하지만 그 수많은 음식들 중에서도 일월담에서 돌아오는 길에 먹은 푸릇푸릇한 고사리무침은 지금도 생각날 정도로 맛있었다.

▲ 곳곳에서 맛본 음식들. 소시지와 우유모찌, 고사리 무침이 기억에 남는다.

제임스의 에어비앤비 숙소에 머무른 일주일이 지나고 체크아웃하는 날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부산과 비슷하다는 가오슝으로 가기 위해 타이중 고속철도역으로 간다고 하자, 제임스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제임스는 일월담에 가느라 고미습지에 가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고속철도역에 가기 전에 들렀다 갈 시간이 되냐고 물었다. 다행히 시간이 조금 남았고 덕분에 운 좋게도 고미습지까지 둘러볼 수 있었다. 여러모로 신경을 써주고 매 순간 진심을 다해 호스팅해 준 제임스 덕분에 내 여행의 깊이가 달라져 있었다.

▲ 제임스가 남긴 후기



아이허 강(Love River)과 사랑에 빠지다


타이중에서 고속철도로 50분가량 걸리는 우리나라의 부산과 비슷한 느낌의 가오슝에 도착한 나는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HJ에게 전화를 했다. 스쿠터로 마중 나오겠다는 HJ에게 내게는 28인치 캐리어가 있다며 숙소까지 잘 찾아가겠노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현지 유심도 와이파이 도시락도 없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그녀는 아파트 입구까지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간 가오슝에는 계속 비가 내려서 일몰을 볼 수 없었는데, 내가 간 날은 날이 좋아서 일몰을 볼 수 있었다. HJ는 노을을 보러 가자며 스쿠터 뒷자리에 나를 태우고 시즈완풍경구(Sizihwan Scenic Area)로 달렸다. 시즈완풍경구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일몰을 보기 위해 모여 있었다. HJ는 계단을 올라야 하는 영국 영사관은 혼자 다녀오라며 자신은 아래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삼각대를 세우고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는 사진사들 틈에 끼여, 꿋꿋하게 스마트폰 카메라로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담으며,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 있었다.

▲ 일몰 & 야경 맛집 인정

해가 넘어가자 HJ가 이번엔 야경 포인트인 서우산 전망대로 안내했다. 가오슝의 랜드마크인 85 스카이 타워도 보이고 가오슝 시내가 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저녁 모임이 있었던 HJ는 숙소 근처의 보얼 예술특구에 나를 내려주고 나중에 숙소에서 보자며 사라졌다. 보얼 예술특구는 곳곳이 공사 중이었다. 나는 공사 중인 곳들을 지나 불빛이 화려 해지는 아이허강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채로운 색의 빛으로 치장한 다리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아이허강에 푹 빠져버렸다.

▲ 아름다운 아이허강의 야경

강을 따라 걸으며 우리나라의 트로트랑 비슷한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는 라이브 공연도 보았는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출출해졌다. 내친김에 도보로 20분 거리의 리우허 야시장까지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정보를 수집하면서 블로거들의 글을 많이 접해서인지 리우허 야시장에 들어서자 마치 우리 동네 시장처럼 익숙한 느낌이었다. 나는 꼬치구이와 맥주를 사들고 다시 아이허강으로 돌아왔다.

▲ 리우허 야시장 풍경

유유히 강을 가르는 유람선의 화려한 불빛을 눈에 담으며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강변을 따라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오며 가며 나를 흘끗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 혼자 여행하는 것에도 놀라워하는 대만 사람들에게 여자 혼자, 그것도 야외에서 술을 마시는 나는 생소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런 나를 구제라도 해주려는 듯 옆 벤치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할아버지 두 분이 말을 걸어주셨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자연스럽게 한국전쟁 얘기가 나왔다.


다만 혼자서 조용히 맥주를 홀짝이고 있을 때보다 세 사람이 손짓 발짓 동원해가면서 어설픈 영어로 대화를 나누니 오히려 더 시선이 집중되었다. 난감했지만 따뜻한 마음 덕분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밤이다.

▲ 기분 좋게 취기가 올라온 채로 숙소로 돌아와 창 밖으로 보이는 아이허강을 바라보며, 가오슝에 살아보고 싶어 졌다.

 


돌아올 이유를 만들다 (feat. 금문도)


가오슝에서는 3일만 머물 계획이었지만, HJ의 숙소도, 무심한 척 챙겨주는 그녀의 친절함도 너무 좋았다. 그래서 이틀을 더 머물기로 결정했다. HJ는 내가 한국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곳들을 발바닥에 땀나도록 찾고 있는 걸 눈치챈 듯했다. 내가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게 팁을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날이 많았다.


HJ는 정말 많은 곳들을 추천해주었다. 그중에서도 스쿠터를 타고 여행했다던 금문도(Kinmen) 이야기는 알라딘의 요술램프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컨딩, 타이동, 화롄, 이란을 거쳐 타이베이로 돌아가는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 여행이라 금문도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24일간의 나 홀로 대만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과 예상치 않게 마주한 감동적인 순간들로 한동안 대만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결국 대만에서 돌아온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금문도행 항공권을 손에 쥐었다. 금문도는 기대만큼 아름다운 곳이었고, 꼭 한국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곳이었다. 언젠가 금문도 여행기도 풀어낼 수 있기를 바라며.




에어비앤비 작가, Sien

로컬처럼 살아보는 여행을 즐기고, 꼼지락꼼지락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해 직접 만들거나 업사이클링한 것들로 꾸민 집에서 에어비앤비를 운영하고 있다.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과 교감을 나누는 슈퍼호스트이자 투어플래너.

인스타그램 @pearlwhitetour

매거진의 이전글 여자 셋이 살고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