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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서리 Feb 25. 2022

진짜와 가짜 : 현대 디자인 라이브러리_도서관 편

인구가 줄긴 줄었나 보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내가 직업상 느낄 정도로 인구는 급격히 줄고 있다. 작년부터 꽤 많은 디자인 의뢰가 들어오는 공간 중 하나는 고등학교 리모델링이다. 말이 리모델링이지, 실상은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수업, 인구 감소로 인한 학생 수 저하, 비록 코로나가 사라지더라도 더 이상 전교생이 몽땅 학교 교실과 강당에 꽉꽉 들어찰 필요가 없어진 급격한 온라인의 사용이 현재의 모습이다. 단 1년 사이의 갑작스러운 변화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던 명문 사립 고등학교들이 죄다 학교 리모델링을 추진 중이다.


어느 날 고등학교 행정실장님 미팅이 있었다. 교내 약 220평 정도의 규모의 한 층에 있던 10개의 교실을 허물고 그 자리에 학생들을 위한 도서관으로 바꾸어 달라는 의뢰였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사실 디자인 의뢰를 받으면 나는 주로 질문을 많이 한다.)


“서가 1M당 평균 60권 정도의 책 수납이 가능합니다. 학교 보유 도서 수량이 어떻게 되나요? 어떤 장르의 서적이 주로 있나요? 한 번에 이용하는 학생 수와 사서는 몇 분이 계시나요? 혹시 가능하다면 도서 큐레이터를 만나볼 수 있나요? 도서관의 기능을 독서실처럼 공부를 위한 공간인가요? 아니면 그룹 토론이나 워크숍? 또는 도서 대출과 읽기와 쓰기 등의 국립도서관의 기능인가요? 그에 따라 콘셉트가 정해지고 레이아웃이 정해지는 시작점이 됩니다.”


“아무것도 정해진 건 없습니다. 3월 개학 전에 일단 공사를 시작해야 되기 때문에 급하게 진행할 거예요. 책 몇 권인지 모르고, 여기저기서 모은 책들 꽂아 둘 겁니다. 그래도 도서관이니까 책장은 예쁘게 많이 만들어주세요. 도서 큐레이터가 뭔가요? 사서는 이제 뽑을 건데, 일단 2명 정도로 생각해주세요. 그룹 토론, 독서실, 도서대출 등 다 가능한 기능으로 넣어주시면 되겠네요. 미국 하버드 도서관이랑 뉴욕 고급 호텔 라운지 느낌 아시죠? 그런 분위기로 예쁘고 싸게 빨리빨리 해주시면 됩니다.”


--------‘안 되겠다! 일단 오늘은 철수!’--------


행정실장님께 엄청난 숙제를 드리고 나오는 한숨 섞인 내 발걸음은 서글프다. 진짜 학생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고 싶은 걸까? 그냥 교실이 남는데, 뭘 만들까 고민하다가 ‘도서관’이라는 근사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하버드 대학과 고급 호텔의 느낌을 가진 도서관이란 무엇일까?




며칠 전 가회동에 있는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투어를 했다. 현대카드는 국내 대기업 중 ‘디자인’으로서 인정받고 있으며, 해외 디자인 페어에서도 현대카드 부스를 종종 볼 수 있어서 디자인 라이브러리를 방문하는 나는 기대감을 안고 있었다.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사진출처_ⓒ오서리


북촌 어느 골목길을 걷고 있다가 우연히 마주한 작은 한옥 안에 더 작은 도서관이 살며시 놓여 있었다. 중정을 그대로 살린 햇살 가득한 마당에 진입했을 때 나의 직업적 걱정은 시작되었다. 빵집과 책방은 직사광선을 받는 방향은 공간 배치상 좋지 않다. 빵은 말라버리고, 책은 바래버리기 때문이다. 간혹 멋지게 전면 유리창을 해놓고 내부에서 블라인드로 가려버린 빵집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나의 걱정은 기우였고, 현대카드는 똑똑했다.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사진출처_ⓒ오서리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사진출처_ⓒ오서리


작은 공간임에도 책을 찾아가는 좁은 복도와 오르내리는 계단의 동선은 산책로 같았다. 라이브러리의 서가는 미리 계산한 빛의 각도에 따라 한 걸음 물러나 있었고, 충만한 빛덩어리는 온전히 이용자의 몫이었다.

공간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라이브러리 디자인을 보러 갔던 나의 부끄러운 시작이었다.

그들은 도서관을 ‘디자인’으로 풀어내지 않았다.

디자이너를 위한 책이 있는 ‘진짜 디자인 라이브러리’였다.

18,000여 권에 달하는 엄선된 기준의 도서의 큐레이팅은 디자인 서적의 올바른 선택과 집중이었다.

(서고 1M에 약 60권의 책이 진열되니, 18,000권이면 300M가 필요하다. 100M 달리기 3번을 뛰는 것과 동일한 길이가 이 작은 한옥 안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앞으로 공간이 작아서 레이아웃이 안된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사진출처_ⓒ오서리


영감, 유용, 진짜, 영향, 광범위, 심미, 소장가치가 충분한

의 7가지 카테고리의 선정 원칙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디자인 라이브러리의 철학과 핵심가치를 책을 통해 스며들게 하였다. 객관성과 전문성 확보를 위해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건축비평가가 북 큐레이터로 도서 선정에 참여하였고,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건축ᆞ디자인부 학예실 수석 큐레이터의 조언도 도서 선정의 기준을 확고하게 하였다. 작은 공간을 슬기롭게 나누어 디자인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읽어주었고, 먼지 가득한 희귀 도서의 가치를 컬렉션 하였다.


디자인을 하기 위한 디자인은 없었다.

도서관이므로 진짜 ‘책’이 있었다.

그것이 디자인의 전부였다.

공간은 오로지 책의 존경심을 위해 한걸음 물러나 있었다.

책을 위한 진짜 라이브러리를 산책한 나는 생각이 많아진다.


내일은 다시 고등학교 도서관 미팅이 잡혀 있다. 이번 프로젝트도 간절함, 설득, 읍소 그리고 ‘진짜 도서관’을 위한 힘겨운 행보가 예측된다. 하지만, 미래 어느 한 부분의 주인공이 될 학생들을 위해

진짜 책과 함께,

진짜 공부를 할 수 있으며,

자신에게 진짜 가치를 심어줄 수 있는

진짜 도서관을 만들어 주는 일이라면

나 역시 진짜 디자인을 완성하고자 한다.


#라이브러리#도서관#디자인라이브러리#현대카드디자인라이브러리#건축디자인예술투어#진짜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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