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톱달방랑자 Nov 15. 2021

잃어가는 것들.

하루를 버티는 중입니다.


유독 못하는 것과 유독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나는 청소나 정리를 그 누구보다 못하고, 대신 책은 누구보다 잘 읽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벼운 책은 10분, 두껍고 어려운 책이라도 30분에서 1시간이면 후루룩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는 것도 그랬다. 일 하면서 찍은 사진 보정작업은 미루기 일쑤였지만, 내가 찍고 싶어 찍은 것들은 아무리 피곤해도 그날 보정을 해치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무기력한 생활이 언제부터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대부분 겨울에 무기력해지는 사람이었다. 농담처럼 겨울엔 동면해야지, 라고 말하고 다녔고, 실제로 그랬다. 동면에 가까운 잠을 자고, 먹지도 않았으니까. 


그렇게 나는 원래 그렇게 타고 난 사람이다, 생각하며 산 지가 어언 30년 언저리가 넘었을 때쯤, 글을 한 편 읽게 되었다. 청소를 하지 못하는 것도, 그만큼 무기력해지는 것도 우울증의 일종이라고. 처음 그 글을 읽었을 때의 나는 코웃음 쳤다. 그냥 청소가 싫은 거지 뭐. 아마도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그때의 나는 우울증보다는 조증에 가까웠을 테다. 그러니 나 스스로 내 주변을 정리할 수 없다는 걸 우울증을 핑계 삼는 게 좀 우스워보였는지도 몰랐다. 내가 안 치워서 그렇지, 치우면 집을 하나 새로 짓는다니까, 하고 큰소리치기도 했고. 실제로 한 달에 한 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집을 치우기 시작하면 욕실 타일 하나, 창문 틈새까지 싹 치워버리곤 했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다시 그 글을 접했을 때, 나는 제법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루 종일 이불 밖으로 나오지도 않아서 침대가 내 모양대로 꺼지지는 않을까 걱정했고, 그러면서도 그 이불속만이 나를 지켜줄 것처럼 꽁꽁 싸매고 드러누웠다. 그러고 나니 그 글이 달리 보이더라. 나는 정말로 방을 치울 엄두도, 힘도 나질 않았다. 또 하나 그 글에서 우울증의 징후로 말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거였다. 긴 글을 읽을 수 없고, 자꾸만 헛발짓하듯이 그렇게 맴맴 돌게만 된다고.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하루에 10권도 읽어내리던 책을 하루 한 페이지도 읽지 못하게 된 후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게 우울증과 얼마나 큰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읽은 글이 제대로 된 글이었는지도 알 수 없듯이. 그런데도,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내가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그 순간이었기 때문에.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걸 아는 누군가들은 철마다 내게 책을 선물하곤 했다. 그 책이 내 취향이든 아니든, 나는 활자 중독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저 읽어내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런데, 이제는 읽지 못한 책들이 한편에 쌓여있다. 그 와중에도 새 책을 사고 싶은 욕구는 여전해서, 그렇게 사들인 책들이 부채감처럼 차곡차곡 방 안을 채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조증이 오면 좀 나을까, 했는데. 문장을 읽을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우울증의 독서가 문장 사이에서 계속해서 길을 잃어 안절부절못하는 느낌이라면, 조증의 독서란 단어들이 이리저리 튀어나가 제 자리를 잃은 채로 나를 현혹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어느 날은 내가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소리 내어 엉엉 울기도 했고, 이렇게 한 땀 한 땀 글을 써 내려가기도 했다. 지금도 이 글이 혹여나, 내가 읽었던 글들처럼 의미 없는 단어들의 나열이 되지 않을까 겁이 나지만, 이 또한 내가 견디고 살아가는 모습 중 하나이지 않을까. 나는 그래서 기록을 멈추지 않을 예정이다. 잃어버린 내 소중한 순간들을 되찾아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나는 요즘, 2주에 한 번 집을 새로 지어주시는 청소 도우미님을 부르고 있다. 한국의 이런 서비스에 감사할 따름이다. 나 스스로 청소를 하기 시작할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이렇게라도 내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냥 나로 살아가고 있는 거다. 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고 있지만, 죽고 싶지 않은 나로. 


독서와 청소를 잃어버린 오늘의 기록 끝. 

작가의 이전글 동백꽃의 꽃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