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 : 부모를 정성껏 잘 섬기는 일
*이 글은 편지형식으로 작성했습니다.
‘효도가 별거 있니? 그저 부모 마음 잘 알아주는 게 효도지.’
이 말은 저희 엄마가 하신 말씀입니다. ‘효도’라는 주제를 받고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몰라서 엄마께 여쭤봤어요. ‘엄마는 효도가 뭐라고 생각해?’ 이렇게 말이죠. ‘효도’라는 주제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엄마와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그때 문뜩 ‘효도’의 사전적 의미가 궁금해서 네이버 사전을 찾아봤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 ‘효도’
1. 부모를 잘 섬기는 도리 2. 부모를 정성껏 잘 섬기는 일
영어사전 ‘효도’
1. (명사) filial piety (한국어 기초사전)
1. (명사) (formal) filial duty, (동사) be a good son(daughter), be devoted(filial, dutiful) to one’s parents (NE능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뜻 그대로, 효도는 부모님을 잘 섬기는 자식의 도리입니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효도는 자식의 의무이자 충성, 신심(piety)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잘 섬긴다’는 어떤 의미일까요? 이거 역시 국어사전에 찾아보니 ‘신이나 윗사람을 잘 모시어 받들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잘 모시어 받들다’가 어느 정도일까요? 그리고 효도의 대상인 ‘부모’는 어떤 대상일까요?
부모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울러 이르는 말(父母)’과 ‘집에서 어린아이를 돌보아 주는 사람(傅母)’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즉,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과 나를 돌봐준 보호자와 선생님 둘 다 ‘부모’란 정의에 속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부’가 ‘아버지 부’(父) 뿐 아니라 ‘스승 부’(傅) 도 쓰인다는 것입니다. 군자와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라는 군사부일체라는 단어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를 낳아준 엄마, 아빠, 선생님이 모두 제 부모입니다.
단어들을 찾아본 결과, 저는 ‘부모’가 한 아이를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존재라고 결론 지었습니다. 사회에 적응하는 첫 단계는 타인과의 관계 맺기입니다. 아이가 처음 관계를 맺는 타인은 당연히 엄마, 아빠지요. 그런데 경험이 없는 아이는 타인보다는 본인 마음이 우선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나와 가까운 타인이자 가장 닮은 점이 많은 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입힙니다. 그래서 모두가 불효자라고 생각해도 본인을 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 없지요.
고백하자면, 저도 제 부모들에게 매우 이기적인 나쁜 아이였습니다. 여기서 부모들이라 지칭한 이유는 제가 관계 맺기를 잘하게끔 가르쳐 준 스승님이 많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부모’의 ‘부’는 아버지와 스승님을 지칭하는데, 제 스승님은 어린 아기 때부터 지금도 여럿 계십니다. 저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많아서가 아니라, 친구와 동생이라도 제게 사회 일원이 되도록 도움을 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이 제게는 스승님이자 부모입니다.
친애하는 부모들에게, 그 당시에는 제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있기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한 채 무심코 행동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전 그때는 알지 못하고 그냥 지나칩니다. 그대들이 제 말과 행동을 잘 받아주고 여전히 너그럽게 대해줄 땐 모르다가, 비로소 그대들이 제게 표출하고 난 한참 뒤에 저는 깨닫습니다. 아직 어리석게도 저는 그 미숙함을 완숙함을 성장시키지 못했습니다. ‘그저 부모 마음 잘 알아주는 게 효도’라는 엄마의 말씀은 쉬운 것 같아도 매우 어렵습니다. 그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며 노력해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타인을 이해’하는 것에서 비로소 한 인간의 성장이 시작된다는 걸 알았으니, 저도 서서히 성장하며 인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친애하는 부모들에게, 항상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그리고 함께 살아갑시다.
-도레보보봉 올림-
(도레보보봉)
효도실패
나는 5월이 좋다. 따스한 날이 계속되며 외투는 가벼워지고, 시원한 음료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초록이 가득한 정취도 4월과는 다른 만족감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은 불편하다. 가족의 달이어서 그렇다.
부처님과 방정환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기 무섭게 그날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모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그날이 나는 어렵다. 감사한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저 우리 모부께서 원하는 것을 나는 마련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쌍방간 원하는 것이 다를 때에는 논의를 통해서 합의점에 도달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일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감사한 마음을 갚으려 무리 하다가 종래에는 모부를 원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추후 원망하며 지내느니 지금 불편하고 나중에 더 사랑하자’ 라는 내 나름의 지혜 가득한 결론으로 정신승리 중이지만, 이 내 맘도 모르는 우리 모부께선 나를 철없다고 생각하겠지. 아 정말 원망스럽기 그지 없다.
어버이 은혜를 갚아서 추후 원망하든지, 은혜 갚을 줄 모르는 효도실패자 타이틀을 달고 원망하든지 어쨌든 인간은 그렇게 원망만 하며 인생을 허비하나 보다. 이쯤 되면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당신은 원망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고쳐 불러야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핏자, aka 꼬북핏자)
29평의 시차 時差
(한봄일춘)
젊은 시절, 꿈 많고 세상 밖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던 엄마. 그런 엄마는 세 남매를 위해 1년 365일 슈퍼마켓 문을 여셨다. 당시 슈퍼마켓에는 조그마한 방이 하나 딸려있었는데 부모님은 그 방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셨다. 슈퍼마켓은 우리 식구의 삶의 터전이었고, 엄마의 활동반경이었다.
자식들 다 시집 장가보낼 때까지 엄마는 슈퍼마켓에 자신의 청춘을 오롯이 쏟아부으셨다. 오랜 세월 그 한자리를 묵묵히 지켜내셨다는 존경과 함께 고단했을 엄마의 생 生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그럼에도 엄마는 괜찮다고 오히려 내 삶을 위로해 주셨다. 29평 그 작은 공간에서.
특발성 비특이성 간질성 폐렴. 엄마의 병명이다. 처음 들어보는 병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희귀병이라고 했다. 지난 2003년부터 엄마는 이 질환을 앓고 계신다. 이 질환은 뚜렷한 원인이 없이 발병한다고 했다. 짐작컨대, 그 뚜렷한 원인은 자식이고, 엄마라는 무게이고, 세상이 29평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리.
처음 병명을 접하고 담당 의사와의 진료상담은 엄마의 병명을 아는 시간이 아닌, 엄마에 대해 무지했던 나를 마주하는 자리였다.
병명을 진단받고도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다. 평상시보다 숨이 조금 찰뿐 괜찮다고 하셨다. 그런 줄 알았다. 일을 조금 덜 하고, 좋은 공기 마시면 금방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 그 해, 병원에 장기 입원하시기 전까지.
그 이후 엄마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계신다. 혼자서 하실 수 있는 리스트도 하나 둘 줄어들었다. 건강에 대한 걱정이 늘어나는 만큼, 내 잔소리의 강도도 점점 강해졌다.
“무리해서 집안일하지 마세요. 설거지는 아버지 보고 좀 하라고 하시고요.”
“약 제시간에 꼭 챙겨 드세요.”
“밥맛이 없더라도 건강 생각해서 좀 더 드세요.”
내 잔소리의 강도에 상관없이 엄마는 점점 쇠약해지셨다.
4년 전 진눈깨비가 오던 날, 여동생에게 걸려온 다급한 전화 한 통.
“엄마가 다시 입원하셨어, 준중환자실에!”
휴대폰 너머로 메아리치는 여동생의 척척한 목소리가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귓가에 윙윙거렸다.
다행히 남은 연차가 있어 며칠을 엄마 병시중을 들었다. 병원에 있던 그 며칠 동안,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모르는 엄마가 더 많아졌음을 새삼 느꼈다. 약에 취해 계속 주무시기만 하는 엄마를 보며 엄마는 뭘 좋아하셨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곤히 잠든 엄마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일도 좋고, 가족도 중요하지만 엄마 몸 좀 챙기세요. 애쓰면서 사느라 엄마 삶 제대로 못 챙기지 말고. 남은 삶은 엄마 원하는 거 하면서 그렇게 살아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전명순 씨!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아요!’
한바탕 쏟아내니 조금은 홀가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병상에 누워 계시는데 아들 걱정만 하던 엄마가 오히려 편해 보였다.
그 이후로도 엄마는 1년에 2~3번은 입원하고 퇴원하신다. 자식들 시집 장가 다 보내고 나면 본인 마음껏 국내로, 해외로 여행 다닐 거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셨는데. 이젠 산소호흡기 없이는 대문 밖으로 한발 떼기도 어렵다.
나와 동생들은 출가하여 분가하였고 지금은 슈퍼마켓 2층에서 부모님 두 분이 생활하고 계신다. 1층에서 2층으로 옮겨왔을 뿐, 29평이 여전히 엄마가 생활하고 있는 공간의 크기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2층 창문 밖으로 비치는 풍경을 하릴없이 바라보는 게 엄마의 유일한 소일거리가 됐다.
“자주 올게요!”
본가에 들렀다 집에 돌아올 때면 어김없이 엄마에게 건네는 인사다. 하지만 인사의 진정성이 부족해서일까? 지척에 있음에도 자주 찾아뵙지 못한다. 학교 업무로, 육아로, 쏟아지는 관계 맺기와 역할로, 본가에 가는 날이 점점 줄어간다.
아침 출근길, 2분 남짓의 전화통화를 그래도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위안으로 삼은 지 오래다. 그 위안도 잠시, 전화통화 끝에는 늘 죄송함이 부산물로 주어진다.
하루 24시간. 우린 모두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 시계는 늘 바쁘고, 엄마 시계는 늘 빠르다.
이제는 부모님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노래하는 미혜씨를 만났습니다.
각: 부모님과의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나요?
미혜: 기억으로 남을만한 추억은 많지 않아요. 아버지가 생활력이 강하시거든요. 가장으로서는 이해하고 존경하지만, 아빠와의 기억이나 부모님과 함께 보낸 특별한 추억이 딱 떠오르지는 않네요.
각: 혹시 서운했던 기억은 있으신가요?
미혜: 음… 제가 어릴 때부터 노래를 했어요. 어릴 때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노래를 잘했어요. 근데 서울에 오니 노래 잘하는 사람이 정말 많더라고요. 노래를 잘 하고 싶고, 제대로 배우고 싶었어요. 하지만 부모님 세대는 예술이나 음악 보단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시잖아요. 그래서 공부가 아니면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시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서운하기도 했는데,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열심히 알바하고 돈 모아서 대학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막상 학교에 가니 생각과는 다르더라고요. 결국 자퇴하긴 했지만, 경제적 지원 없이 학교생활을 유지하려고 계속 열심히 알바를 했죠. 한번은 운이 좋게 노래 경연대회에서 상을 탔어요. 그 부상으로 ‘노래’만을 배우기 위해 학원에 등록했었어요. 그때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러고 보면 살면서 뭐든 제가 스스로 감당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잘 소화되지 못하고 부모님께 서운한 마음으로 남아있는 것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 공부하던 오빠는 제정적인 지원을 다 받고 자랐거든요. 오빠와 비교하기도 했었고, 서운한 마음에 부모님께 화를 냈던 적도 있었어요. 철이 없었죠. 근데 결혼도 하고, 부모님과 함께 나이 들어가다 보니 조금은 알 것 같더라고요. 그때 부모님은 당신들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셨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각: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자식이라 그런지 서운한 일을 더 잘 기억하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거든요. 혹시 어릴 때 생각하던 효도가 있으신가요?
미혜: 어떤 모습으로 효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잘 하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시골에서 자랐잖아요. 시골에 작은 군이나 시에서 하는 노래대회가 있는데, 여러 번 1등을 했었어요. 한번은 1등 상품이 제주도 상품권이었는데, 1등해서 선물해드렸어요. 그때 효도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잘하는 게 노래밖에 없기도 하고, 노래로 부모님께 인정받고, 노래로 뭔가 해드리고 싶었던 같아요. 음… 지금 생각해보니, 부모님께 효도를 ‘드리겠다’ 보다는 제가 부모님께 인정을 ‘받고 싶다’라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네요.
각: 부모님께 내가 어떤 것을 주기보다는 받기를 원한다는 말이 인상적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찔리기도 하네요. 올해 어버이날에는 잘 드리셨나요? 어떻게 보내셨어요?
미혜: 친정이 군산이에요. 멀기도 하고, 일도 해야 하기 때문에 5월 첫째 주에 미리 인사 드리고 함께 식사하고 왔어요. 어버이날 당일에는 현금을 드렸습니다. (웃음) 명절이나 큰 행사 땐 대부분 시댁에 먼저 가게 되더라고요. 여자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시댁이 가까운 곳에 있어서 자주 부르셔서 가게 되는데요. 부모님께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각: 혹시 지금 생각하는 효도의 모습이 있으신가요?
미혜: 부모님이 용돈 드릴 때 정말 좋아하시거든요. 근데 용돈보다 더 손주를 바라세요. 지금 제가 부모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효도는 손주를 안겨드리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둘이 벌지 않으면 힘들어서 미뤘는데, 미루다 보니 이제는 나이가 있어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더라고요. 절반 정도는 포기한 상태에요. 그래도 손주를 안겨드리고 싶거든요. 이런 상황과 마음을 아시면서도 가끔 너무 손주를 바라실 땐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이 좀 무거워져요.
각: 부모와 자식, 가족관계에서 신경 써야 할 중요한 부분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미혜: 가족끼리 비교하지 않고 고유성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결혼을 해서 시댁에 부모님도 생겼거든요. 남편과 제가 다르듯 시댁과 친정 가족간의 분위기도 달라요. 예전에는 가족 모임이 많은 시댁가족들이 친밀하게 느껴져서 부러운 마음을 느끼기도 했는데요.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친정은 친정 나름의 애틋함이 있고, 각자 다른 가족의 분위기 모두 안정적으로 느껴져요.
그리고 자립도 중요해요. 우리가 가족으로 모였지만, 가족이기 전에 각자 개인으로 자립적인 독립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보통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에 자신을 버려가며 희생하고, 서로를 챙기는데요. 이럴 땐 개인적인 기대나 바람이 들어가는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은 좀 삼키고, 각자의 모습 그대로 잘 살아주기를 바라면 좋을 것 같아요. 그게 부모와 자식 서로를 위하는 일인 것 같아요. 말을 하다 보니 왠지 저에게 하는 말 같네요. (웃음)
각: 효도의 반대말은 불효인 것 같은데요. 혹시 불효는 효도의 실패가 될 수 있을까요?
미혜: 음… 아니요. 그렇지 않을 것 같아요. 효도에 실패한다 한들 부모님이 불행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불효한다면 부모님의 입정에서 불행하다고 느낄 것 같아요. 물론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요.
각: 그렇다면 끝으로 나에게 실패란?
미혜: 음… 도전해볼 수 있는 건강한 실패도 있지만, 헤어나올 수 없는 실패도 있어요. 그런 실패는 참담하죠. 저 같은 경우에는 돈을 벌어야 했고, 정말 악착같이 살았어요. 저처럼 막무가내로 하기보단 뭐든 시작하기 전에 많이 알아보고, 사람들과 충분히 대화하면서 지혜롭게 준비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런 경험 때문인지 제가 실패를 두려워해요. 실패를 견딜 수 없어서 도전을 하지 않아요. 안전하고 평탄한 걸 좋아하죠. 하지만 삶에는 늘 도전이 필요해요. 머리로는 아는데, 쉽게 행동하지 못하더라고요. 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제가 용기도 없고, 겁이 많아 도전하지 못하는 걸 알죠. 그래서 저도 게으름에 숨어버려요. 근데 실패도 삶의 한 부분이고, 왔다가는 패턴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드리면 좋을 것 같아요. 내 인생만큼은 쫄보가 아니어도 되잖아요. 내가 하는 거니깐 내가 견디고 이겨내면 되잖아요. 근데 그 한발을 때기가 어렵네요. 그래도 이제는 이제는 실패를 해보고 싶어요.
실패월간 9호 끝.
크고 작은 실패를 응원하는 실패 각성 잡지 실패월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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