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스터 스마일>
이 글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은행 강도가 등장하는 영화에는 언제나 이런 시퀀스가 존재한다. 먼저 주인공은 복면을 뒤집어쓰고 은행으로 들어간다. 재빠르게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 천장을 향해 총을 한 발 쏘고 ‘모두 엎드려!’라고 외친다. 그리곤 직원에게 가방을 던지며 돈을 담으라 명령한다. 강도들이 한눈을 팔면 엎드려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몰래 핸드폰을 꺼내려고 한다. 이를 알아차린 강도는 그를 총으로 위협하며 가방을 챙겨 도주한다. 하지만 이미 직원이 책상 밑에 있던 비상 버튼을 눌러 경찰이 도착하는 와중이다. 이제 스릴 넘치는 자동차 추격전이 시작된다.
이 영화 또한 은행 강도가 주인공이다. 그런데 중절모와 트렌치코트를 차려입은 모습이 여느 은행 강도와는 달라 보인다. 여기에 따뜻한 매너와 말투까지 겸비했으니 훈훈한 노신사의 정석이다. 이 신사분이 바로 영화의 주인공 포레스트 터커(로버트 레드포드)이다. 그는 노년의 은행 강도이다. 체력적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은행 테이블 위로 뛰어 올라가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직원에게 다가가 품속에 숨긴 권총을 보여주고 가방을 건네며, 돈을 담으라 지시한다. 깊게 팬 주름에 미소 띤 얼굴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때로는 오늘 하루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슬퍼하는 직원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보내기도 한다. 심지어 포레스트가 등장하면 어김없이 배경에는 재즈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유형의 은행 강도이다.
이런 신사분께서 도대체 왜 은행을 터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의 직업이니까. 왜 그 길을 걷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먹고 살기 위해, 큰돈이 필요해서 하는 일은 분명 아니다. 은행에서 가져온 돈은 자신의 집 마룻바닥 아래에 쌓아둘 뿐이다. 그가 수십 곳의 은행을 털고도 멈추지 않는 이유는 그저 그 일이 좋기 때문이다. 남들은 70대 은행 강도라고, 퇴물 갱단이라고 비웃지만 그는 그 일을 사랑한다. 이를 증명하듯 은행에서 그를 만난 피해자들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는 친절했고 행복해 보였어요.’ 진정으로 은행 터는 일에 행복감을 느끼는 주인공이다.
이 영화가 평범한 은행 강도에 대한 영화였다면 우린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언제 잡힐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영화를 봤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보고 있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고, 흐뭇해진다. 바로 포레스트 터커라는 강도의 매력 때문이다. 그는 멋진 외모와 언변을 가진 인물이다. 하지만 그를 빛나게 해주는 것은 그의 인생관이다. 삶을 대하는 여유와 너그러움, 여기에 은행 터는 일을 삶 그 자체로 인식하는 멋진 직업관까지. 그렇다. 이 영화는 포레스트 터커라는 은행 강도를 통해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백미는 마지막 씬, 존과 통화를 마친 후 깡총하고 보도블록을 뛰어오르는 노인의 뒷모습이다. 우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여유롭고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엔딩 크레딧을 맞이한다.
I’m not talking about making a living, I’m just talking about living.
한편, 주인공의 이런 면을 부각하기 위해 그와는 정반대의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포레스트를 수사하는 경찰, 존 헌트(케이시 애플렉)이다. 포레스트와 존은 강도와 경찰이라는 역할을 통해서도 대립하지만,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반대 입장을 견지한다. 존은 이제 막 마흔 살을 맞이했다. 한 살 한 살 나이 먹는 게 싫어 생일 파티도 하기 싫다. 노년인 포레스트에 비하면 아직 한창인 나이이지만 무기력에 빠져 자신의 인생은 내리막만 남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지리한 코로나 시국에서 이 영화를 맞이한 관객들이라면 포레스트보단 존에 마음이 더 동하게 된다. 번아웃 된 그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이 슬쩍 엿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존이 포레스트를 쫓으며 활기를 되찾았던 것처럼, 잠시 영화 속 은행 강도를 보며 웃음을 되찾아 보는 건 어떨까?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멋진 은행 강도가 등장하는 판타지 같은 실화 기반의 영화 <미스터 스마일>을 보며 말이다.
<미스터 스마일(The Old Man and the Gun)>,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