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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pine Nov 08. 2020

은희의 일기. 1994년 그 어느 날

영화 <벌새>




이 글엔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현관문 너머의 침묵에 더욱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은희. 이내 다른 집 문을 두드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계단을 올라 엄마가 맞이하는 집으로 들어간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가 앞으로 우리와 어떤 감정 고리로 연결될지 말해준다. ‘불안’. 그리고 ‘해소’. 중학교 2학년,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는 은희는 마치 시소같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두 가지 감정선과 계속해서 맞닥뜨린다. 이 감정들은 은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관계들을 통해 형성된다. 영원한 단짝일 것만 같던 지숙과의 다툼,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 같은 풋사랑과의 만남과 이별, 가부장적인 가정 내에서의 갈등과 상처, 그리고 봉합, 동경하던 선생님의 죽음까지. 은희가 경험하는 그 감정들은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불안으로 점철되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러나 영화는 ‘어떻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내어주지 않는다. 결말에서 등장하는 영지의 편지와, 그와 함께 오버랩되는 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왜’에 대한 답을 준다. ‘그래도 세상은 아름답고 인생은 살만하다. 우리의 삶에는 항상 빛이 드리우고 있고, 그 자체로 찬사 받아 마땅하다.’ 관객들은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해 듣고 영화관의 문을 나서게 된다.


주인공 은희는 불안한 우리의 삶을 대변한다.


<벌새>는 이렇듯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를 위해 주인공인 은희가 겪는 여러 에피소드들은 어떤 것 하나 도드라지지 않는다. 흔히 생각하는 이야기의 구성, 기승전결이라든지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과 같은 법칙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저 하나씩 하나씩 동등한 준위로 나열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영화의 법칙이 아닌 인생의 법칙을 따라간다. 올라가면 내려가고, 내려가면 올라가는 앞서 언급한 시소와도 같은 인생을 그려낸다.


삶에 대한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이 영화가 택한 방법은 철저하게 보편성을 획득해 내는 것이었다. 누구나 겪어봤을, 경험해봤을 은희의 경험을 통해 스크린 속 이야기는 관객 각자의 이야기가 된다. 인물, 사건에는 어떠한 가식도 없다. 심지어 은희가 살고 있는 1994년에 벌어진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은 TV 뉴스를 통해 담담하게 전해질 뿐이다. 영화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에세이로 옮겨간다. 장롱 깊숙한 곳에 놓여있을 1994년의 일기가 되어, 이제 관객들은 먼지 쌓인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듯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불안하지만 따뜻하다. 영화 <벌새>는 영지가 은희에게 그러했듯, 우리에게 버팀목을 제공해주고자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분명하게 일깨워주고자 하는 것이다.



<벌새>,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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