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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Mar 27. 2024

태평성대의 꿈 -십장생도 3화

비애당 정원에는 복사꽃이 활짝 피었다.
이른 아침, 안견은 초본을 들고 안평대군을 찾았다.

처소에는 박팽년과 성삼문이 와 있었다.   

  

“어제 밤늦게까지 그렸다고 들었소. 어찌 몸은 괜찮은 것이오?”    

 

“육신은 조금 피곤하오나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맑사옵니다.”

    

“어디 초본을 봅시다.”  

   

130cm 크기의 종이에 그린 초본이 방바닥에 펼쳐졌다.

안평대군은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그림을 살펴본다.    

 

“박팽년, 성삼문 두 분께서 초본 양쪽을 잡고 일어나 보시겠소?”  

   

“초본이 한눈에 보이니 훨씬 좋습니다.”  

   

그렇게 한참이나 초본을 살펴본 후 자리에 앉았다.     


“안견, 초본을 설명해 주시오.”   

  

“네, 대군의 꿈 이야기를 최대한 담고자 했습니다.
사건과 시간에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개됩니다. 오른쪽의 도입부는 대군과 박팽년이 도원에 들어가기 전의 평범한 산천의 모습입니다.
중심부는 도원의 관문으로 높고 깊은 기암괴석과 오솔길, 하천, 좁은 동굴을 배치하였습니다.
왼쪽에는 깊은 산에 둘러싸인 넓은 공간에 꽃이 활짝 핀 복숭아나무 숲과 집과 밭을 그렸사옵니다.”     


안평대군은 손뼉을 치며 호탕하게 말한다.     


“좋습니다. 아련한 꿈을 이렇게 그려놓으니,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제가 가장 신경 쓴 곳이 있습니다. 중앙 하단에 작은 동굴이 보이십니까? 동굴은 현실 세계와 도원을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만약 이 동굴이 없다면 양쪽 세계는 단절될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꼼꼼히 살펴보면 성삼문이 말한다.                                                                                 

[하단 부분에 하천이 흐르고 작은 동굴이 보인다. 이 동굴은 현실과 태평성대를 연결하는 핵심 요소이다. 이 동굴은 이후 십장생도에 표현되면서 몽유도원도와 관계에 결정적 증거 역할을 한다.]   

  

“도입부에는 말을 탄 두 사람과 노인이 그려져 있네요.
두 사람은 대군과 박팽년이고, 손을 들어 길을 가리키는 사람은 산관야복 노인을 표현한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도원에서 밭을 가는 사람, 뛰노는 아이,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모습의 사람도 보입니다. 이건 대군의 꿈속에는 나오지 않는데 안견이 추가해서 넣은 것이오?”   

  

“네, 도연명의 무릉도원 이야기를 참조하였습니다.”   

  

성삼문은 안평대군에게 고개를 돌린다.  

   

“대군, 인물 때문에 현실감이 높긴 하지만,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온전한 도원의 모습을 보는데 방해가 됩니다.”   

  

성삼문이 눈짓을 주자 박팽년이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았다.   

  

“대군, 그림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견은 나가서 대기하도록 하시오.”  

   

“정작 그림을 그려야 하는 사람은 안견이오. 나가지 말고 논의에 참여하는 것이 좋겠소.”  

   

성삼문은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대군께서는 사사로운 꿈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기기 위해 조선 최고의 화원을 부리는 것입니까?”


“아니오. 나는 조선이 끝내 이르고자 하는 태평성대를 그리고자 하오.
이 그림이 완성되어 천세에 걸쳐 남겨지기 바라오.”    

 

이러한 안평대군의 생각은 훗날의 기록에도 남아있다.
[몽유도원도]가 완성된 지 3년이 지난 정월의 어느 날 밤, 비단에 붉은 먹으로 시를 썼다.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산관야복 은자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은 일이려니
여러 천년을 이대로 전해지기를 헤아려보는구나’    

 

“그렇다면 도원은 대군만의 세상이 아닌 조선 백성의 세상이 아니옵니까?”   

  

“그렇지요.”     


“그림 속의 대군이나 박팽년은 특정한 사람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본다면 대군과 박팽년이 만드는 세상이라고 여길 것이 틀림없습니다.”     


성삼문은 도발적으로 물었다.    

 

“대군은 왕이 되길 원하십니까?”    

 

집현전 학사들은 조정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다.
1년 후인 1448년, 왕세손(단종)이 책봉되고 박팽년, 성삼문은 세손의 스승이 된다.


[안평대군은 마치 노을이 지는 것처럼 복사꽃이 피었다고 했다. 이에 따라 안견은 복숭아나무 숲을 촘촘하게 그리고 붉게 채색을 했다. 입체감을 높이기 위해 흰색 물감으로 덧칠까지 했다. 몽유도원도의 중심은 도원이다. 도원을 이렇게 강조한 것은 확고하게 각인시키기 위함이다.]    

 

안평대군이 정색을 한다.   

  

“무슨 소립니까? 장차 왕이 되실 왕세자가 있고, 이미 아바마마를 대신해 나랏일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내 이미 여러 번 말했소. 나는 왕세자를 보필할 것이고 여러 문인과 더불어 시와 그림으로 평생을 살고자 하오.”  

   

“그렇다면, 그림 속에는 인물을 그리지 않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안평대군은 심각한 표정이다.     


“자칫 심각한 정치 문제가 될 수도 있겠소. 나와 박팽년뿐만 아니라 산관야복의 노인도 그리지 않는 것이 좋겠소. 안견의 생각은 어떠하오?”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이기에 제 소관이 아닙니다.
대군과 박팽년의 모습을 뺀다면, 그림의 구도에 맞게 도원의 여러 사람도 그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없다면 너무 적막하게 보이지는 않겠소?”   

  

박팽년이 안견을 보며 묻는다.  

   

“그렇게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제 소관입니다.
수묵으로 그린 후에 엷은 색으로 칠해 화사하게 만들고, 특히 도원의 복사꽃은 마치 노을이 지는 것처럼 채색하여 황홀한 분위기로 만들 것입니다.”    

 

심각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안평대군이 웃는다.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오. 오로지 안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오. 하하하.”   

  

[우리 그림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전개한다. 글쓰기와 동일하여 사건의 전개, 시간의 흐름에 따라가기 편안하다. 아래 그림처럼 안견은 기존의 구도를 뒤집어 도원을 가장 앞쪽에 배치했다. 이러한 구도의 변화는 최종 목적지인 태평성대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안견과 안평대군의 정치적 관점이 같았기 때문에 이런 획기적인 구도를 사용할 수 있었다.]    

 

안견이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말한다.   

  

“여쭙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대군의 꿈은 단지 개인의 꿈을 넘어 조선의 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꿈을 이루는 과정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꿈의 목적인 태평성대가 중요합니까?”

     

박팽년이 말을 받는다.

    

“태평성대는 최종의 목표입니다. 지금은 이루는 과정이 중요하지요.
성군이 민본정치를 해야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성삼문은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태평성대는 처한 현실과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달라집니다. 부패한 관리나 부유한 사람은 태평성대라고 하지만, 가난한 백성에게는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과정은 조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현실의 조건이 어렵다고 여겨 태평성대의 꿈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안평대군이 말한다.    

 

“그렇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태평성대에 대한 확고한 신념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성리학이 있고, 민본정치가 필요한 것이지요.
현실감이 있고 구체적일수록, 그 꿈을 이루고자 하는 구체적인 실천이 일어납니다.
태평성대의 모습이 우선입니다.
안견, 답이 되었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박팽년, 성삼문께서는 초본을 뒤집어 보십시오.”  

   

180도 뒤집은 초본을 밝은 창에 비추자 놀라운 모습이 펼쳐졌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전개되던 그림이 반대로 좌측에서 우측으로 바뀌었다.

    

“오오! 꿈의 종착지인 도원이 가장 먼저 보입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구도이자 화법이오. 역시, 조선 최고의 화원입니다.”    

 

“저는 물러가 그림에 매진하겠습니다.”     


그렇게 3일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

조선 최고의 명작인 [몽유도원도]가 탄생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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