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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규섭 Jun 23. 2024

태평성대의 꿈 - 십장생도 13화

겨울이다.
몇 차례 큰 눈이 내렸다.

근 3달에 걸친 세화 제작이 끝났다.


도화서 화원 20여 명이 각각 20점을 그려 400여 점, 자비대령화원 10명이 각각 30점을 그려 300점, 총 700점의 세화를 그렸다.
팔도의 지방화원의 작품까지 합한다면 1,000여 점이 훌쩍 넘는 방대한 양이다.     


몇 달간 야근을 밥 먹듯이 했지만,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다.
세화 제작은 도화서의 주된 업무이자 가장 공을 들이는 일이다. 무엇보다 화원들의 근무를 평가하는 주요 자료로 사용되었다.   

[십장생도/심규섭/디지털그림. 도화서에서 창작한 십장생도는 국가의 공식 그림으로 주로 궁궐이나 관청에 두었다. 많은 공력, 비싼 가격 때문에 민가에서 창작하거나 소유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세화 작품 평가회가 열렸다.
이번 평가회에 참여한 사람은 예조판서와 도화서 별제를 비롯해 화원, 자비대령화원, 사습생도, 차노비, 홍문관 응교까지 100여 명이다.  

    

예조판서가 앞서 말한다. 

    

“세화는 조선이 건국된 이후 꾸준히 제작해 왔습니다. 세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닙니다. 세화에는 조선의 정치, 사상, 문화가 총합 되어 있습니다.
세화를 통해 임금부터 왕실의 친족, 고위 공직자, 아래로는 지방과 하급 관료에 이르기까지 같은 철학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번 세화 그림 중에 십장생도 병풍 그림만 100좌입니다. 이렇게 많은 십장생도를 제작한 연유가 무엇입니까?”   

  

“임금께서 특별히 하명한 것입니다. 십장생도는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담고 있기에 많이 보급하라고 하셨습니다.”  

   

젊은 화원이 말한다.  

   

“십장생도는 창작이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래서 주로 임금의 친족이나 판서 대감들에게 하사한다고 들었습니다. 정작 백성들이 십장생도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홍문관 응교가 대답한다.     


“이 문제를 두고 홍문관에서 충분한 의견 개진과 토론이 있었습니다.
세화를 백성 모두에게 나눠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위 관직자에게 하사하는 세화는 개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국가의 세금을 들여 제작한 공공그림이지요.
이렇게 하사한 십장생도는 주로 관청과 같은 공공장소에 배치하여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임기나 벼슬이 끝나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관청이나 고위 관직자 집안의 십장생도는 백성들의 가례나 각종 행사에 함께 사용했습니다.”     


“부연하자면,
조선은 민본정치를 추구합니다.
조선의 주인은 백성이고 임금을 비롯한 관직자는 백성을 위해 복무하는 사람들이지요.
십장생도는 관직자에게 자신의 역할이 뭔지를 상기시켜 주고, 백성들은 삶의 방향과 미래를 확고히 합니다. 이렇게 민과 관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십장생도/비단에 채색/세로 151.0cm*가로 370.7cm/19세기/국립중앙박물관. 황학, 청학, 거대한 영지를 그렸고, 왼쪽의 큰 호수는 작은 하천으로 바뀌었다. 소나무 이파리는 앙상하고 오른쪽 중간에 있는 동굴은 거의 막혀있다. 조형적 전통을 무시하고 현실의 욕망을 강조했다.]     


“도화서는 국가미술기관입니다. 여기에 속한 화원은 모두 공무원이지요. 여러분은 고위 관직자의 개인적인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창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그림은 모두 백성의 삶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만약 도화서와 같은 국가미술기관이 없다면 십장생도는 어떻게 됩니까?”   

  

“조선이 망하면 몰라도 도화서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오.” 

    

“그래도, 생각해 볼만 한 문제입니다. 십장생도는 엄청난 공력과 비용이 들어갑니다. 조선 최고의 화원이, 국가의 재원을 들인 물감과 비단, 붓을 사용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민간에서 십장생도를 창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광통교에서는 판매되는 십장생도는 누가 창작하고, 누가 사 가는 것입니까?”  

   

“도화서에 근무했던 전직 화원이나 제자, 사습생도 중에서 화원이 되지 못한 화공들이 창작한다고 들었습니다. 도화서에서 그려본 경험을 바탕으로, 상상을 더하여 그리다 보니 수준 차이가 납니다. 사물을 엉터리로 그리거나 왜곡하고 형상을 극도로 단순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광통교의 십장생도는 평균 1억 정도로, 5억 원에 이르는 도화서의 그림보다는 많이 저렴합니다. 화원의 수준이 떨어지고 물감의 질이 낮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1억 원은 엄청나게 큰돈입니다. 주로 중인 출신 부자들이 주문한다고 합니다. 가끔 마을에서 돈을 추렴하여 주문하는 일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극소수 부자들이 소유한 십장생도는 백성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저 가족이나 가문에 속한 사람만이 태평성대를 추구할 뿐이지요.”     

[십장생도 10폭 병풍/비단에 채색/19세기 말/아모레 퍼시픽 미술관. 일반적인 십장생도 화면 구성과 많은 차이가 있다. 소나무가 중앙에 있고 큰 호수 대신 개울로 바뀌었다. 왼쪽에 있었던 아침 해와 오른쪽으로 옮겼다. 애매하게 그린 동굴, 청학과 황학, 과도한 구름과 영지, 화면을 상하로 가르는 개울은 시공간을 좁히는 역할을 한다. 혼란하던 시대상이 반영된 결과이다.]    

 

“광통교 화공들은 십장생도 병풍 그림보다 간결하게 그린 도안을 훨씬 많이 그린다고 합니다. 이런 도안은 장롱과 같은 생활 가구, 이불이나 배게, 신발, 노리개, 옷, 식기 따위의 문양으로 사용합니다. 

십장생도는 이미 백성의 생활 속에 녹아있습니다.”     


“세상은 생각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철학이 먼저입니다. 어떤 삶이 가치 있고,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지를 아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십장생도는 조선의 철학과 태평성대의 꿈을 보여줍니다.
십장생도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 먹이는 그림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십장생도를 통해 확고한 태평성대를 꿈꾼다면, 이는 곧 임금을 비롯한 관직자에게 민본정치를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할수록 십장생도는 무서운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있는 이상, 임금이나 관직자는 민본정치에 매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 세화 제작도 잘 끝났습니다. 이후 업무 평가를 통해 적절한 포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도화서와 자비대령화원에 속한 여러분은 조선이 꿈꾸는 세상, 민본정치를 통한 태평성대를 창조하는 세계 최고의 화원입니다. 자랑스럽습니다.”  

   

“평가회는 이 정도로 마칩시다.
종로에서 제일가는 주점에 술과 음식을 마련해 두었소. 오늘은 편하게 먹고 마십시다.
아 참, 마누라와 자녀들을 위한 좋은 선물도 준비했으니 가져가시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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