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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토마토마리네이드

여름 주말 단상

by ondo

나는 매 끼니마다 먹고 싶은 게 있다.

장염으로 진땀 흘린 게 엊그제이면서도 돌연 칼칼한 낙지김치콩나물죽을 먹어볼까 생각하고, 저녁 먹을 시간을 한참 놓친 어느 겨울밤엔 불현듯 소갈비찜이 먹고 싶어 패딩코트를 단단히 여미고 부츠를 신고서 마트에 달려가 냉동 소갈비를 기어코 사다가 핏물을 빼고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그것을 먹고야 만다.


못 먹고 산 것도 아닌데 나는 먹는 것에 상당히 집착하는 편이다. 그런 걸 스스로 깨달을 때마다 나 또한 이상한 인간이라는 걸 겸손히 받아들인다. 섭식에 별 열의가 없는 내 남편은 그게 신기하다고 말한다. 그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먹는 편이라서 내가 가끔 질리고 무서울 것이다.


오늘은 비 예보가 없는데 습도가 높은지 자고 일어난 자리가 꿉꿉하다. 이런 날엔 상큼한 조반으로 몸과 마음을 살살 달래 가며 하루를 열어줘야 한다. 가족과 오랜 시간 가까이 붙어 있는 날이니까 서로에게 다정하고 정중하게 다가서려면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토마토 마리네이드를 만들어볼까 하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채소칸에 오이가 없다. 방울토마토가 있으니 오이만 깍둑 썰어 넣으면 되는데.

여름날엔 땅이 본격적으로 데워지기 전인 아침도 외출이 마뜩잖다. 땀이 나면 지치고 뭐든 귀찮아지니까 코앞 슈퍼도 나가는 게 망설여진다.


대강 찬밥을 데워 김 싸 먹는 것으로 한 끼 때울까 하다가 이미 오일에 반들반들하게 굴려진 빨간 토마토알들이 내 머릿속 아침상에 풍성하게 차려진 터라 별 수 없이 장을 보러 나갔다.

일곱 살 아들도 따라나섰다. 얘는 주말엔 나와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한다. 평일에 채워지지 않는 모성애를 주말에라도 기어코 보충해야 제가 살 수 있고 클 수 있다는 듯이 내게 꼭 붙어있는다. 때로는 내 수족보다 얘가 더 나의 지체 같다. 내 손가락보다 발가락보다 아이의 몸이 더 가까운 데 있다.


내년에 학교에 들어가는 나이가 됐고 더구나 남자아이니까 이런 시간이 몇 년이나 더 이어지겠나 싶어 나는 아이에게 기꺼이 나의 틈을 허용한다. 엄마의 얼굴과 목소리가 지겹고 싫어질 아이의 사춘기의 시간을 연출해 보면서 나는 미래의 내 아이에게 받을 상처와 상실감, 배신감을 매일 조금씩 연습하는 중이다. 여러 인생을 미리 살아보면 나중에 닥쳤을 때 덜 아프다는 걸 안다.


여름철엔 역시 오이가 인기 있는 식재료인지 매대에 몇 봉 안 남았다. 곁에 나란히 진열된 가지나 애호박은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 듯 쌓여있다. 가지나 애호박은 굽든 찌든 볶든 조리를 해야 먹을 수 있는 반면 오이는 깨끗이 씻어 생으로 먹을 수 있으니 살 때 고민이 적을 수밖에 없다.


다른 손님에게 선택되지 않은 오이들 중 그나마 가장 신선해 보이는 것으로 골랐다. 꼭지가 마르지 않고 얇고 색이 또렷한 것으로 골랐다. 나는 매번 공을 들여 채소를 고르는데, 골라가면 이런 건 고르면 안 된다는 시어머니의 말을 듣는다. 어떤 건 굵으면 안 되고 어떤 건 얇으면 안 되고. 나보다 먼저 어머니가 된 여자들은 내가 모르는 세상 이치들을 많이 알고 있다.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죽을 때까지 사소한 것들마저 다 배울 순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마음이 누그러진다.


플라스틱 팩에 담긴 복숭아도 장바구니에 담았다. 다섯 알에 7900원짜리가 있고, 9900원짜리가 있다. 2천 원 더 비싼 게 아마 더 맛있을 것이다. 나는 아들 손을 잡고 비싸고 덜 비싼 복숭아들 사이를 오가며 고심하다가 7900원짜리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같은 개수인데 2천 원 차이가 크게 느껴지는 건 요즘 가난하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패키지 틈 사이를 조금 벌려 딱복의 향을 맡았다. 복숭아는 천사의 향기 같다. 아기 천사의 몸에서 날 것만 같은 냄새다. 망고 같이 달디 단 열대과일처럼 노골적으로 달거나 짙은 향기를 피우지 않아서 품위가 느껴진다. 일 년 내내 여름 복숭아를 그리워하는 나는 복숭아를 보면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붙여 찬사를 보내고 싶다. 2천 원의 차이가 역시 맛의 차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 슬퍼질 거 같아서 슈퍼를 나오는 길에 조금 후회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이를 씻고 씨앗이 늘어선 속을 길게 잘라냈다. 샐러드에 씨를 빼지 않은 오이를 그대로 넣으면 금세 물이 흥건해져서 나중에 먹기 싫어진다. 나는 흥건해진 물을 보면 타인의 침 같아서 비위가 상하기 때문에 씨를 빼는 노고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속이 빈 오이를 반으로 갈라 깍둑깍둑 썰어놓는다. 방울토마토도 흐르는 물로 씻어내고 물기를 뺀 다음 가로로 반 세로로 반 자른다. 스텐볼에 오이와 방토, 올리브유, 발사믹식초, 소금, 레몬즙, 꿀, 통후추를 넣어 잘 섞으면 토마토 마리네이드 완성. 새콤하고 달콤하고 쿰쿰하기도 한 냄새를 맡으니 허기가 졌다.


남편이 깨기 전에 요리를 끝내고 싶어서 마음이 분주했다. 샐러드를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해 놓으면 열이 많은 남편이 더 좋아할 것 같아서 손이 도마 위에서 바쁜데 아들은 자꾸만 만화 틀어달라, 우유 달라, 자기도 엄마를 돕겠다며 치대서 내 심신을 혼란하게 만든다. 그래도 미래의 성장한 아들에게 불친절하고 무심한 엄마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서 모든 물음과 청에 일일이 응대해 준다.


요즘 남편은 직장에서 매일 누군가에게 뺨을 맞듯이 일을 하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에 선 채로 오는 파도를 막지 못하고 쓸리고 밀려가며 버티고 있다. 흐르는 시간이 쉼 없이 과거가 되는 것에 유일한 희망을 건 채로.

나는 그가 내가 만든 차가운 샐러드를 입 안 가득 넣고 씹으며, 오늘은 다행히 토요일이고 이 시간은 운 좋게도 가족과 함께 쉴 수 있어 안심이라고 마음을 놓기를 소원했다. 그리고 스텐볼에 섞인 신선한 토마토 마리네이드를 유리밀폐통에 쏟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아침 10시가 되어가니 그가 곧 일어날 것이다.



*배경화면: 언스플래쉬 다운로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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