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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

헤어질 결심

by ondo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모닝콜처럼 울리는 그의 문자에 눈을 뜨고, 밥때 맞춰 오는 전화를 받으며 그를 알아갔다. 그는 뭐랄까, 오랜 세월 손때가 묻어 길이 잘 든 좋은 가죽 같다고 해야 할까? 그에겐 새내기와는 겉도는 분위기가 감돌았는데 보는 이에 따라 그게 그의 매력일 수도, 매력을 반감시키는 요인일 수도 있었다.


신중하다거나 눈빛에 힘이 있고,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디딘 안정적인 에너지를 풍긴다고도 볼 수 있지만 요즘 말로 힙하다거나 산뜻하다거나. 싱싱한 초록의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이런 그의 양면의 균형이 내 마음 안에서 잘 맞도록 애를 쓰며 그를 알아갔다. 조금 더 그를 좋아할 수 있도록 힘을 냈다.


그는 사귀자는 말을 한 지 일주일 만에 내게 사랑한다고 했다. 내가 침묵하자 너는 왜 답이 없어, 실망인데.라고 말했다.

“그 말이 쉬워?”

“진심이니까.”

그의 말과 행동엔 거침이 없었다. 자기 마음에 확신이 들고, 상대방의 마음에 확신까진 아니어도 조금의 여지가 느껴지면 뭐든 밀고 나갔다. 말이든 행동이든 선점했고, 이끌었다.


그는 나대거나 요란스럽게 행동하지 않아도 만장일치로 과대표가 되었다. 그에게 장을 맡는 일은 종이를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다. 그가 한마디 하면 와글대던 소란이 그치고 모두들 그에게 집중했다. 신입 오리엔테이션 때 학생회장이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종이컵에 소주를 따르며 넌 차기 회장감이라고 학생회로 들어오라고 끈질기게 권했다. 매력은 취향에 달렸지만 그에게 권위의 오라가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는, 육사 출신으로 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인 자기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아버지의 존재는 그의 그림자였고, 그가 걸어온 길이자 앞으로 걸어갈 방향이었다. 나는 그와 사귀는 동안 그의 아버지 얘기를 많이 들었다.


“아버지가 술 한잔 드시고 오시는 날엔 집 앞 빵집에서 남은 빵을 몽땅 쓸어 오시거든. 집에 들어오자마자 방문을 쾅쾅 두드려. 자는 우리 넷을 깨우는 거야. 나와서 빵 먹으라고. 그럼 우린 눈은 감고 입은 열고 단팥빵이나 크림빵을 먹으면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또 듣고 그렇게 새벽까지 무릎 꿇고 듣다가 아버지가 그만 자라, 하고 방에 들어가시면 그때서야 자러 들어가는 거지.”

“괴로웠겠네..”

“벌서는 거지.”

그는 벌서는 거지, 하면서도 빙그레 웃었다. 아버지의 주사와 새끼를 향한 사랑 사이에서의 해프닝쯤으로 마무리하는 그의 말에서 술에 대한 인식과 관대함을 그때 예민하게 파악했더라면.


그는 술을 좋아했고, 많이 마셨다. 2차는 당연하고,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3차를 가지 못하는 날엔 미적대고 걸었다. 1차는 주로 삼겹살에 소주, 2차는 치킨과 맥주, 3차는 꼬치와 맥주. 3단계가 그의 음주 매뉴얼이었다. 나는 녹진한 술자리의 공기를 좋아했고, 술도 꽤 마시는 편이었지만 여흥을 넘어 술이 생활의 주가 되는 식은 원치 않았다.


궁금하고 하고 싶은 게 많은 나이였다. 대학로에 가서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고, 두산 베어스 경기를 직관하고, 여의도 공원에서 벚꽃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기차를 타고 부산 영화제를 가고, 동네 공원을 산책하고,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은 연애 다운 연애를 하는 것.

돈이 없어서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었지만 술을 마시느라 할 수 없는 일이 차곡차곡 쌓이니 억울하고 서글펐다.


남들의 연애에도 지린내와 술냄새를 풍기는지, 매일 헤어지는 시간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이를 가족에게 인계하는 일로 끝나는지 궁금해졌지만 알기 두려웠다. 캠퍼스 안팎에서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다니는 커플의 얼굴은 가벼웠고, 맑았기에 나와 다른 그들의 산뜻한 연애기를 듣고 나면 그의 뺨에 싸대기를 올리곤 “쌍놈아, 잘 가라!” 하고 싶을 것 같아서다. 나는 그와 닮은 면이 있었다. 귀한 말. 무거운 말. 나는 내가 한 말을 지키고 싶었다.


그는 내가 입학하자마자 들어온 학교방송국에 PD로 들어왔다. 본인도 언론사 취업에 관심이 있던 차에, 나중에 과 선배가 “걔도 방송국 들어가고 제 갈 길 다 찾아가네.”라는 말에 원서를 냈다고 했다. 학교방송국 사람들은 술을 매일 마셨다. 공강마다 이어지는 선배들의 교육은 술로 마무리되었다. 봄과 여름엔 학관 앞에 돗자리를 펴놓고 새우깡과 컵라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고, 추워지면 곰장어집이나 냉동삼겹살집을 찾아 소주를 마셨다.


한 한기를 마치도록 우리가 사귀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당분간 비밀로 만나자는 내 제안에 인상을 구기며 야구모자를 몇 번씩 고쳐 썼지만 크게 반발하지 않고 내 뜻에 따라주었다. 그의 성정이 완고한다한들 내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는 나를 일주일 만에 사랑했지만 나는 몇 달이 지나도록 호감과 의심 사이에서 그에게 끊임없는 의문을 갖던 때였다. 성질대로 하다가 내가 달아나기라도 할까 봐 그는 겁을 내고 내 눈치를 봤다.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캠퍼스 내 돌바닥이 갈변한 플라타너스 잎으로 뒤덮일 무렵이었다. 우리는 학교 옥상에서 나란히 어깨동무를 한 채 나라사랑, 동기사랑을 외치며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2학년 방송국 선배가 교내방송 큐시트를 동그랗게 말아 쥐고는 내 코앞에 들이대며 니들은 단군 이래 제일 멍청한 기수이며, 최악의 오합지졸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나라를 잃은 듯한 슬픔과 회한의 얼굴을 하고서 소주를 마시러 갔다. 학교 정문 건너편 골목길 어귀에 있는 닭곰탕집 구석 자리에 앉은 우리는 씨발놈, 지가 무슨 엄기영이라도 되냐며, 그를 안주삼아 허공에 대고 악다구니를 치고 테이블을 쾅쾅 내리쳤다. 저녁을 먹으러 온 손님이 주방에 들어간 사장을 불러내 무슨 이야기를 건넸고, 우린 쫓겨났다.


그때 아나운서 동기 하나가 속이 안 좋다며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해서 내가 그 애를 부축해 근처 번듯해 보이는 건물로 들어갔다. 기술팀인 남자 동기 하나도 자기도 화장실에 가야 한다며 종종거리며 우리에게 합류했다.


그가 바람막이 주머니에서 꺼낸 핸드폰을 들고 가볍게 흔들며 전화할게,라고 내게 입을 벙긋거렸다. 나는 누가 알아챌까 봐 고개를 다른 데로 돌려 작게 끄덕였다.

내가 화장실에 데려간 여자 동기는 속병이 났는지 장에 탈이 났는지 먹은 것들을 위아래로 쏟아냈다. 동기는 화장실 문을 붙잡고 서서 가만 생각하더니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눈물, 콧물, 번진 아이라인과 마스카라로 얼룩진 얼굴을 한 그녀를 데리고 약국에서 나왔을 때 나는 핸드폰을 가방 안에서 꺼내보았다. 부재중 전화 17통. 그에게 걸려온 전화가 17통. 나는 깜짝 놀라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받지 않았다. 술 깨는 약을 한입에 털어 넣은 동기가 다른 동기에게 전화를 걸어 다들 어디에 모여있냐고 물었고, 대답을 듣는 그녀의 눈이 점차 가늘어졌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여자 동기는 내게 팔짱을 끼며, 무슨 일 있냐고 묻는 내 말에는 대답도 않고 큰일 났다며 나를 학교 앞 놀이터로 끌고 갔다. 뛰다 걷다 골목을 몇 번이나 돌아 찾아간 놀이터에는 동기들이 두 패로 나뉘어 동그랗게 모여있었다. 나의 비공식적 남자친구인 그는 팔짱을 낀 채 짝다리를 짚고 그네 옆에 서있었고, 그의 옆엔 남자 동기 둘이 그에게서 심각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보였다. 시소 옆에는 여자 동기 둘과 남자 동기 한 명이 손바닥으로 오른쪽 뺨을 감싸 쥔 엔지니어팀 남자 동기 주변을 둘러싼 채 서있었다.


“야, 무슨 일이야?”

속을 비워내고 해독 약의 힘을 빌은 동기가 그에게 다가갔다. 동기들은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움찔하며 지나갈 공간을 만들어냈다.

“때렸다니? 누가 누굴 때렸다는 거야? 도대체 왜?”

그는 그녀를 노려보고는 우리를 헤치고, 뒤에 어정쩡하게 서서 사태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나도 지나쳐 큰 걸음으로 ‘피해자’에게 다가갔다.


“새끼야, 진단서 문자로 보내라.”

그에게 주먹으로 맞은 남자 동기는 입에서 깨진 치아 조각을 뱉으며 그를 노려봤다.

남자친구가 그에게 주먹질을 한 이유는 황당했다.

내가 전화를 17통이나 받지 않았고, 우리와 화장실에 함께 간다고 나섰던 남자 동기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고, 그런 기분에 사로잡혔던 차에 ‘피해자’가 된 동기가 한 시답잖은 농담 때문이었다. 그 농담은 폭력을 가하기에는 전혀 명분이 안 되는 유치한 장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좋은 기회였다. 헤어질 기회. 그에게 시간이나 정 따위의 이유로 스며들기 전에 용기를 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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