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나도향‧현진건‧김유정
식민지 시대 우리 소설에는 많은 가난들이 그려진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작품들이 가난 때문에 빚어지는 아내의 매춘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아내의 매춘을 그리는 작가의 시선이나 시각이 다양하다.
우리 근대소설에서 아내의 매춘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은 아마도 김동인의 「감자」(1925) 일 것이다. 가난한 농가 출신 복녀는 80원에 홀아비에게 팔려 시집을 간다. 그 80원은 홀아비가 가진 마지막 전 재산이었고 팔려온 복녀는 이후 남편을 먹여 살려야 했다.
어느 가을밤 복녀는 빈민굴 여인들과 함께 중국인 채마밭에 감자(고구마)를 훔치러 간다. 복녀는 주인인 왕서방에게 붙잡히지만 오히려 그로부터 돈을 건네받는다. 그 뒤로 왕서방은 무시로 복녀를 찾아오고 그때마다 남편은 눈치를 채고 스스로 알아서 집밖으로 나간다.
복녀 스스로 왕서방 집을 찾기 가기도 하는데, 얼마 후 왕서방은 처녀를 하나 마누라로 사 온다. 복녀는 왕서방의 새 여자에 대한 질투로 낫을 들고 왕서방에게 덤비다가 그로부터 죽임을 당한다.
복녀가 죽은 후 왕서방과 복녀의 남편 사이 몇 차례 교섭이 있고, 복녀의 남편은 10원짜리 지폐 석 장을 손에 쥔다. 그리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의 진단을 받고 공동묘지로 간다. 작가 김동인은 복녀가 남편을 부양할 때까지는 그녀의 매춘을 즐기듯이 방조한다.
그러나 복녀가 왕서방에게 질투를 느끼고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드러내자, 그녀를 가차 없이 죽음으로 내몬다. 복녀의 남편 역시 어떤 주저함도 없이 바람난 아내의 살인에 공모한다. 김동인은 가난에 희생되는 여인을 그리지만 여성 자신의 욕망만큼은 저주를 드러낸다.
이와는 반대로 나도향의 「뽕」(1925)은 여성 자신의 욕망을 적극 옹호한다. ‘김삼보’의 아낙 ‘안협집’은 인물이 좋아, 동리에서 돈푼이나 있는 젊은 남자들은 거의 다 한 번씩 ‘후려낸다.’ 아내의 이러한 행동에는 남편 김삼보의 책임도 있다.
남편은 집에는 “한 달에 한 번을 올까 말까 하면서도 올 적에는 빈손을 들고 오는 때가 많으니”, 안협집이 나름대로 호구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안협집과 남편 사이에는 별다른 갈등이 없다.
대신 이웃집 머슴 삼돌이와 안협집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육욕이 승한 삼돌이는 “동리 계집으로 반반한 것은 남모르게 다 건드려보았으나, 안협집 하나가 내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안협집은 삼돌이와 함께 남의 뽕밭으로 ‘서리’를 하러 간다.
그러나 뽕밭을 지키던 사내에게 들키는 바람에 삼돌이는 먼저 튀고 안협집만 사내에게 손목을 잡힌다. 이후 삼돌은 안협집 남편과 동네 사람들에게 ‘뽕밭 사건’을 일러바치는 한편, 마치 ‘스토커’처럼 밤중에 혼자 있는 안협집을 찾아와 추근거린다.
동네에는 안협잡과 삼돌, 그 두 사람 사이를 두고 수상쩍은 소문이 돌고 안협집의 분노는 극에 이른다. “맘에 드는 서방질은 부정한 일이 아니요, 죄가 아니요, 모욕이 아니나 맘에 없는 놈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당하는 것은 무서운 모욕 같았다.”
안협집은 정조도 헤프고 돈 때문에 외간 남자에게 몸을 팔기도 하나, 한 번 맘에 들지 않는 사내는 죽어도 막무가내인 자못 주체적(?) 여성이다. “정조가 헤프기로 유명한 만치 또 매몰스럽기도 유명한” 여자인 것이다. 나도향은 그런 여자의 욕망을 제대로 인정해 주는 듯싶다.
현진건의 「정조와 약가」(1929)의 가난한 아내는 남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용한 의원을 찾아가 왕진을 간청한다. 의원은 원래 가난한 이들의 왕진을 받지 않으나 그 아내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에 혹해서 왕진을 나선다.
왕진을 가던 중, 의원은 산기슭 풀밭에서 환자의 아내를 범한다. 집에 도착하자 아내는 남편에게 자기가 죄를 저질렀다며 울고, 환자는 아내에게 당신이 뭔 죄냐면서 잘했다고 위로를 한다. 며칠간 의원은 환자의 집에 기거하며 밤에는 환자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
아내는 옆방에 의원이 있는 것도 관계치 않고 남편에게 말하길, 첨엔 당신의 약값을 위해 몸을 파는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얘기한다. 남편은 천연덕스럽게 “그럼 서로 위해서 하는 일이 부끄러울 것이 뭐람”하며 내외가 서로 쓸어안는다.
「정조와 약가」는 여성의 행실의 옳고 그름엔 그리 관심이 없다. 단지 아내의 매춘을 바라보는 남성 가부장의 무기력하고 불안한 모습을 그린다. 이는 식민지 아래 피해의식에 젖은 민중의 집단무의식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김유정의 「소낙비」(1935)의 ‘리주사’는 부자이자 호색한으로 동네 여자들을 죄다 후린다. 가난한 춘호의 처도 이에 넘어간다. 리주사는 그녀에게서 자신의 욕심을 막상 채우고 나자, 목욕을 오랫동안 못한 그녀의 몸에서 나는 악취에 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지청구를 준다.
춘호 처는 정조보다는 리주사의 지청구가 부끄러웠지만, 리주사에게 계속 받을 돈으로 남편과 같이 하게 될 서울에서의 새로운 삶을 생각하며 이를 아무것도 아닌 일로 치부한다. 심지어 남편 춘호는 아내가 리주사에게 갈 때 그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공들여 치장해 준다.
생존이라는 인간 삶의 절박한 진실 앞에서 정조라는 윤리 등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부차적인 것이란 말인가! 김유정은 정조 등의 윤리를 내세워 마치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는 듯이 얘기하는 도덕주의자들의 교훈을 우습게 보는 것 같다.
「감자」는 아내의 매춘을 통해 여성의 욕망을 꾸짖고, 「정조와 약가」는 가부장적 남성의 무력과 불안의 무의식을 보여준다. 「뽕」은 여성의 욕망을 인정하고, 「소낙비」는 정조윤리를 우습게 본다. 개인적으론 「뽕」과 「소낙비」가 훨씬 사태의 진실에 육박해 그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