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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문규 Aug 25. 2024

이태준 소설 속 이승만

이태준은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단편소설 작가로 얘기된다. 그러나 장편소설에서도 그런 건 아니다. 그는 해방되기 전까지 열 편 정도의 장편을 남겼다. 주로 애정의 삼각관계를 그리는 통속적인 소설인데 어느 걸 읽어도 내용이 다 비슷비슷하고 수준도 고만고만하다. 


단 『불멸의 함성』(1935)이라는 장편은, 주인공 청년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얘기와 함께  미국 생활도 그려져 소재에서 다소 이채를 띤다. 이태준은 미국에 가본 적은 전혀 없으니, 이 소설에 그려진 미국 이야기는 모두 작가가 전해 들은 것을 기초로 한 것이다.


주인공인 고학생 ‘두영’은 의학 공부를 위해 존스홉킨스 대학으로 유학 간다. 이 대학이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 있음에도 작가는 계속 필라델피아로 얘기한다. 두영이 학비 마련을 위해 유타 주의 빙햄캐니언 구리광산서 일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이 광산은 실제 있던 곳이다.


두영은 일본에 있는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유학을 떠난다. 요코하마서 일본 선박으로 출발하는데, 호놀룰루를 둘러 샌프란시스코까지 직행하는 배다. 하와이에서 두영은 일본 영사관의 보증을 받지 못해, 그곳 조선인동포협회서 나온 이들의 보증금으로 간신히 하선한다.


동포들의 주선으로 두영은 이승만이 세운 기독학원을 방문한다. 이 학교는 하와이에 있는 제일 큰 조선인 교육기관으로 학생은 백 명 정도 된다. 두영은 기독학원 학감의 영접을 받고 학생들 앞에서 강연도 하면서 동포들의 향학열에 감격해한다.   


저녁 식사는 YMCA서 하는데, 그곳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 몇을 만난다. 그런데 그들은 두영의 면전서 기독학원 학감과 이승만을 싸잡아 ‘욕지거리’를 해댄다. ‘리박사’(이승만)를 존경하는지를 묻고는 그렇다 하니까 이승만과 관련된 불명예스러운 얘기도 노골적으로 들려준다. 


두영은 이러한 그들의 행동에 불쾌해하며 적잖이 실망한다. 두영은 미국서 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동포사회의 분열을 조선 시대 당파싸움에 빗대어 비판하면서 동포들이 대동단결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두영은 동포들이 전하는 이승만에 관한 험담이라든지 비난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선 함구한다. 그 비난의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중요한 건 두영이 이러한 이승만에 대한 비난을 조선인들의 패거리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이에 대단히 분개해한다는 점이다.  


실제 역사적 문건들을 볼 때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서나 미국 본토 또는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벌일 때 늘 주위 사람들과 갈등을 벌인다. 그는 어떻게 보면 정치적 야망도 컸고 또 정치적 카리스마도 강해 자주 주위 사람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일단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방식을 놓고 그의 정치적 또는 이념적 맞수와 대립한다. 이승만은 기본적으로 실력양성과 개량주의 노선에 입각해 있었다. 이는 혁명 또는 무장투쟁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쪽과 대립적 입장이다.   


하와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서 조선인 군사학교를 세워 무장투쟁을 강조한 박용만과, 그러한 과격한 방식보다는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과 외교적 방식을 통해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는 이승만은 서로 대립했고, 이 둘의 대립은 하와이 동포 사회를 극심히 분열시킨다.


하와이의 이승만(왼쪽)과 박용만


『불멸의 함성』을 쓴 이태준을 비롯해, 하와이 동포들 중 많은 이들이 결국엔 이승만을 지지하는 것으로 기운 듯싶다. 미국서 공부해 박사학위까지 받은 (호칭조차 ‘리 박사’ 아닌가!) 이승만이, 총칼을 들고 싸우자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합리적인 사람으로 보였을 게다.


그런데 여기엔 약간의 함정이 있다. 『불멸의 함성』이 발표되기 10여 년 전, 즉 『불멸의 함성』의 대략적 시간 배경이 되는 1923년, 이승만이 경영하는 하와이 한인기독학원의 교사와 학생 23명이 교사 신축비를 모금한다는 명목으로 국내를 방문한다. 


이들 모국방문단은 2개월 동안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면서 모금활동을 벌였고 그 결과 공식적으로만 3만여 원의 모금실적을 올리고 하와이로 돌아간다. 이에 대해 재미 한인사회 안에서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그 이유는 소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인 이승만이 설립하고 운영하는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합법적으로 국내를 방문하여 순회했다는 것이 사실상 일제의 식민통치를 인정하는 행위였고, 그것은 이승만의 대일 자세가 어떠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이태준도 이 사실을 알았을지 모른다. 이태준은 해방 후 이승만이 귀국하고 그가 해방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 가는 것을 보면서 북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북에서도 역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되어 한국전쟁 후 숙청을 당하고 그 행적이 묘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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