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역사 선생님이 수업 중 하셨던 농담 섞인 강의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화투(섯다)에서 ‘가보’가 중요한 끗수지만, 한국근현대사에서도 ‘갑오’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갑오년, 1894년은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고, 우리 조정의 요청으로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청일전쟁이 터진다. 동시에 일본의 사주를 받은 개화파의 경복궁쿠데타로 갑오개혁이 있었다.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이라 부르는 이인직의 『혈의루』(1906)는 불과 10여 년 전 일이었던 바로 이 청일전쟁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는다. 청나라와 일본은 한반도에서 몇 차례의 전쟁을 치르는데 그중 가장 치열한 격전을 치른 평양성 전투가 『혈의루』의 배경이 된다.
당시 평양성을 방문한 선교사 제임스 게일은, “평양은 시체로 가득 찼고, 주민들은 모두 흩어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혼잡했던 거리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라고 기록했다. 『혈의루』에서는 전쟁의 참화를 겪은 백성들의 들끓는 분노가 그려진다.
“땅도 조선 땅이요, 사람도 조선 사람인데,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남의 나라 싸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이렇게 참혹한 일을 당해야 하는가!?” 나라가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은 조선의 부패한 양반 관료들 때문이라고 이를 갈면서 이들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특히 『혈의루』는 평안감사로 재임했을 당시 갖은 탐학을 일삼고, 동학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던 민비의 척족 민영준에 대한 울분을 쏟아낸다. 흥미롭게도 민영준에 대한 이러한 내용들은 현재 우리가 읽는 대부분의 『혈의루』 텍스트에는 빠져 있다.
이인직은 합방 후 『혈의루』를 개작하면서, 초기에는 친청파였다가 후일 친일파로 변신한 민영준을 내용에서 삭제했기 때문이다. 민영준을 뺐든 넣었든, 『혈의루』는 우리 백성들이 청일전쟁으로 참화를 겪기는 했어도 결과적으로 그것이 동양의 평화를 가져왔다는 결론을 내린다.
일본에서 기록된 『일청전쟁 외사』에도 유사한 구절이 나온다. “일청전쟁은 동양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비록 조선 정부는 좌시우고 우왕좌왕하였으되 조선 민중은 이 전쟁의 정의를 깊이 깨닫고 일본군에 대단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등등.
『혈의루』는 청일전쟁의 이모저모를 그리고 있으나, 청일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된 동학농민전쟁은 그리지 않는다. 『혈의루』에 이어 발표한 이인직의 『은세계』(1908)는, 강릉서 일어난 농민 소요를 그리고 있어 동학농민전쟁을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는 한다.
단 이인직을 비롯한 식민지 시대 대부분의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동학농민전쟁을 동학이라는 사교에 현혹된 몽매한 농민집단이 일으킨 난리라고 생각한다. 『은세계』에서 이인직은 나라가 망하게 됐다고 농민들까지 들고일어나면 나라가 진짜 망할 수밖에 없다며 한탄한다.
친일개화파 이인직(그는 이완용의 정치비서이기도 했다)은 동학 농민 집단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보수적 유림 세력은 부정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 동학의 무리들에게 극렬한 증오 및 혐오를 드러낸다. 경술국치 때 순국자결한 매천 황현에게서 그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황현은 “대나무를 깎아 그 끝에 먹물을 묻혀, 살갗 아래 글자를 새기듯 살다 갔다”는 강직한 선비다. 그의 『오하기문(오동나무 아래서 역사를 기록하다)』에는 비단 동학농민의 무리만 아니라 이들에 협력하는 입장을 보인 일부 양반관료에게까지도 대단한 분노를 드러낸다.
농민군들이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게 되자 당황한 조정에서는 청렴하고 명망 있는 김학진을 새 전라감사로 임명한다. 이 김학진은 동학농민군에게 유화적 자세를 취해 동학군이 전주성을 함락한 후 정부와 휴전을 하자 동학군의 대장 격인 전봉준을 만나 협상을 벌인다.
황현은 이에 대해 분노하길, “김학진은 이들(전봉준 등)을 교화시킬 수 있다고 믿어 감영의 군정을 모두 봉준에게 넘겨주고, 봉준은 이러한 학진을 끼고 호남을 마음대로 요리했다. 아침에는 학진의 머리를 베어내다 걸고 저녁에는 봉준의 시체를 찢어야 마땅하다.”라고 한다.
또 황현은 이 무렵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임금이 동학군과 협력해 일본을 토벌하고자 했다고 하는데, 이는 도적의 무리들이 백성을 현혹하기 위해 과장해서 퍼뜨린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런 소문을 상당히 믿었다고 한심해 마지않는다.
'동학란’ 즉 ‘동학당의 반란’은, 동학혁명’, ‘동학농민운동’,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또는 ‘동학농민전쟁’ 등으로 이름이 바뀌어 가는데 이는 아주 오랜 세월을 거쳐 이뤄진다. 참고로 북한 역사학계는 동학농민전쟁에서 종교적 색채를 아예 빼고 ‘갑오농민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