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는 그의 초기 시에서 “아비는 종”이라고 하거나, “징그러운” 뱀 등을 등장시켜 시인을 ‘저주받은’ 자의 이미지로 그려낸다. 급기야 ‘천형’을 갖고 태어난 “‘문둥이”를 빌려 시인의 운명과 처지를 암시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이 시기는 서정주 시의 빛나는 시절이었다.
시인 자신이 실제 문둥이일 경우 이러한 처지를 시로 승화해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한하운은 1919년 함흥의 부잣집 장남으로 태어난다. 1936년 중학시절 문둥이라는 청천벽력의 선고를 받고 한때 거리의 걸인으로 전락하기까지 하는 고단한 삶의 여정을 이어간다.
그는 나병환자로서 자신의 암흑과도 같은 나날로부터의 탈출구를 문학에서 찾고자 한다. 해방 직후 발표된 그의 시는, 특수한 처지의 나환자로 겪은 자신의 고통이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가난과 혼란의 상황에서 겪은 밑바닥 사람들의 고통과 닿으며 보편성을 얻는다.
1950년대 전쟁의 와중에서 상이군인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손과 발 등 신체의 일부를 잃고 고통을 겪는다. 한하운 시에서 그려진 나환자로서의 신체적·정신적 고통 등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전라도 길-소록도로 가는 길에」(1949)은 나환자 수용소가 있는 소록도를 향하는 시인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그린 것이리라.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가도 가도 千里(천리) 먼 全羅道(전라도) 길”
한하운 시가 감동을 주는 것은 시인 자신이 나환자로서의 고통을 회피하거나 거기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마주서서 자신의 인간다움을 고수하고자 하는 시인의 강인한 태도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고 저주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죄명은 문둥이 …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법이올시다.(「벌(罰)」) 또는,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하늘과 땅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나」)이라고 자신을 저주하기도 한다.
“저 길도 아닌/이 길이다 하고 가는 길//골목 골목/낯선 문패와/서투른 번지수를 우정 기웃거리며//이 골목/저 골목/뒷골목으로 가는 길.//저 길이 이 길이 아닌/저 길이 되니/개가 사람을 업신여기고 덤벼든다.”(「막다른 길」)
한하운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의 회고록 『나의 슬픈 반생기』(1959)에서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부정하는 ‘우생학’적 발언을 한다. 우생학은 인류후대의 질 향상을 위해 적격자의 탄생률을 높이고 부적격자는 덜 태어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세기 후반 등장한 우생학은 반세기 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인류 최악의 열매를 맺는다. 나치뿐 아니라 20세기 전반 미국 역시 우생학을 근거로 열등하다고 판정받은 수많은 사람을 시설에 격리하고 강제로 불임수술까지 시행하는 반인륜적 행위를 자행한다.
한하운은 일제 말 히틀러의 패망에 크게 실망한다. 그는 히틀러를 “인간을 질적으로 향상하는 데 전 목표를 두고, 인간의 악적 요소를 도태제거 하면서 민족을 우수하게 우생개선”하려고 했던 적격의 지도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는 히틀러의 『마인 캄프(나의 투쟁)』을 애독하면서 국수적 민족주의를 신봉하고 자신은 비록 병들었을지언정 자신의 정신을 올바르게 지향하여 민족을 개량하고 일본 학생들과 싸우는 데 선봉에 서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우생학은, 유전성 질환이나 한센병 방지를 위한 불임 수술 내지 강제 시술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우월한 자를 낳아 기르고 나머지를 도태시키는 것이 인류 발전에 이롭다’는 우생학의 논리를 반박하기란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러나 우생학의 이름으로 자행한 나치의 장애인 가스 학살은, 유대인과 다른 소수민족을 대량 학살하는 전조이자 사전준비가 된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우생학을 우생학적으로 열등한 조선을 죄의식 없이 침략할 수 있는 윤리적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말인데 한하운 시가, 치유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한센병 환자들의 낙인과 격리 등 폭력의 다층적인 실체들을 밝히지 못하고, 개인의 힘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 한센병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내는 데까지 나가지 못한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