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미국 언론들은 이를 광주에서 일어난 ‘riot(소요)’, 또는 ‘rebellion(폭동)’으로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용어들은 사라졌지만, 1894년 있었던 ‘동학농민전쟁’은, 아주 오랜 기간 ‘동학란’ 즉 ‘동학당의 반란’으로 불려 왔다.
흥미롭게도 1960년대 이르러서 박정희는 자신의 쿠데타를 5‧16 혁명으로 미화하면서 여기에 덤으로 껴 넣어 ‘동학란’ 역시 ‘동학혁명’으로 승격시킨다. 그러나 혁명이든 난이든 동학이라는 종교가 그 중심에 놓여 있다는 점에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1980년대 역사의 변혁주체로서 민중이 강조되면서, 이 사건이 동학에 의해 촉발되기는 했지만 전개과정에서 농민계급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보면서, 동학혁명은 동학농민혁명 또는 동학농민전쟁으로 불러지게 됐다.
북한은 아예 이 사건에서 종교적 역할을 삭제하여 ‘갑오농민전쟁’이라 부른다. 어찌 됐든 이후 동학농민전쟁을 그린 문학 작품들은 농민을 주인공으로 부각한다. 동학농민전쟁 100주년에 맞춰 완간된 대하역사소설 송기숙의 『녹두장군』이 그런 대표적 예의 작품일 것이다.
역사 연구자가 아닌 나는 동학농민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늘 아쉽게 여기는 게, 파죽지세로 서울로 북상하던 동학군이 왜 전주성을 점령하고 관군과 휴전을 맺었는가 하는 점이다. 동학군이 지체 없이 그냥 북상했다면 우리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에서다.
전주화약을 맺을 수밖에 없던 주요한 이유로, 농민전쟁을 틈타 조선반도에 진주한 일본과 청 등 외세의 개입을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얘기된다. 소설 『녹두장군』은 이에 한 발 더 나아가 동학군이 관군과 휴전을 할 수밖에 없는 사연을 농민들의 현실적 문제를 통해 보여준다.
전주 화약은 5월 7일 이뤄지는데 이 시기는 한창 바쁜 농사철로 동학군의 주축인 농민들로서는 귀가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동학군 지도부는 전쟁 상황임에도 김매기 조직인 두레를 장려해 군병이기에 앞서 농사꾼인 농민군들의 생활 근간을 보호코자 했다.
『녹두장군』이, 농민 중심으로 그리다 보니, 농민군들이 움직일 적 밥은 어떻게 해 먹는지 등의 사실도 흥미롭게 그려진다. 솥 지참이 어려워 쇠가죽에 밥을 해, 나눠준 수건 위에 소라껍데기로 밥을 퍼 소금과 함께 올리면 입으로 밥을 베먹고 혓바닥으로 소금을 찍어 먹었다.
동학농민군들은 전문적 군병이나 혁명가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녹두장군』은 이러한 농민들의 모습들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기에, 동학농민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본질에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단 『녹두장군』은 끝으로 갈수록 농민군의 활동을 무용담 식으로 그려 민중을 낭만화하고 이상화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역사소설이 사실성을 얻기 위해서는, 농민이 역사변혁의 주체냐 아니냐의 여부를 떠나, 이들 기층계급을 중심으로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오래전 북한에서 출간된 박태원의 『리순신 장군전』(1952) 역시 선조 등의 지배계급이나 이순신만을 중심으로 임진왜란을 그리지 않는다. 당대 농민들의 현실을 놓치지 않고 그려, 역사에 훨씬 사실적으로 접근한다. 가령 『리순신 장군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등장한다.
도망하는 왜적의 퇴로를 끊기 위해 전라좌우도 수군 사만 명이 바다에 집결하는데 그들 거개가 농민이었다. 당시 전국 팔도 가운데 병화를 별로 입지 않은 곳은 오직 전라도 뿐이었는데, 군량은 다 이곳에서 나오는 터였다.
그런데 도내 장정들은 모두 수군 아니면 육군으로 뽑혀 나갔고, 후방 백성들은 군량을 수송하는 소임을 맡아, 봄이 다 가도록 가래와 호미를 잡고 밭에 나가서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이대로 가다가는 백성들이 생업을 잃을 뿐 아니라, 군량 공급의 길이 막힐 게다.
그래서 농사 때를 아주 놓치기 전에 절반은 귀농하게 하고 아울러 싸움에 상한 군사, 병든 군사들을 치료도 하고 쉬게도 해 준다. 『리순신 장군전』 은 이러한 농민의 동태를 놓치지 않고 그리고 있어서 좀 더 당대의 현실에 사실적으로 접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