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도시 역사는 기원전 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가본 여행지들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도시인 셈이다. 파르테논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언덕은 해발 158m 밖에 안 되지만 오르는 길은 계단도 없고 지그재그로 굽어진 비탈길이라서 생각보다 한참을 올라가는 것 같다.
이 길이 적어도 2500년 이상이 된 길이라고 생각하고 걸으면 감회가 다르다. 게다가 오르는 길 곳곳에 옛 건축물들이 돌기둥 정도는 남아 있지만 무너져 내린 돌, 돌 더미들이 방치돼 있어 아테네는 진짜 오래된 도시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에 있다. 내가 갔을 때 그 주위로 기중기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고 언제부터 시작했고 언제 끝나는 줄도 모르겠지만 신전은 계속 보수 중이었다. 장비들 말고도 신전 안팎으로 정리되지 않은 돌덩이 잔해들로 주변은 대단히 어수선해 보였다.
그러나 수 세기 동안 무너져 내린 폐허 속에서도 파르테논은 의연히 서 있다. 오히려 폐허 속에 그렇게 서 있으니 더 거대하고 장엄해 보였다. 남은 돌기둥들은 아크로폴리스의 푸른 하늘을 우람하게 떠받치고 있고 멀리 보이는 푸른 에게해 바다를 압도했다.
이 신전은 기원전 447년에서 438년 사이에 건설됐다. 누구 말로는 석공이자 조각가였던 젊은 소크라테스도 이 건설 현장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시기가 아테네의 최전성기이자 문화적으로 절정기였다는 점이다.
서양인들이 가장 뛰어난 건축이라 믿는 그리스 건축 중에서도 이를 대표하는 파르테논에 대한 예찬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 철학자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의 근원』(1952)에서 위대한 예술이 무엇인지를 이 파르테논 신전을 통해 설명한다.
하이데거는 예술은 현실을 모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 정신을 표출하는 것도 아니라고 얘기한다. 예술은 오직 그것으로서 존재하는 의미를 드러내게 하는 ‘탁월한 방식’이다. 예술은 존재 그 자체다. 이게 도대체 뭔 말인가!?
파르테논의 존재 그 자체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바탕과 터전, 곧 감춰있던 ‘대지’를 드러내고 마련해 준다. 파르테논 신전은 드높이 우뚝 솟아 있음으로써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허공을 보이게 하고, 또 흔들리지 않게 함으로써 휘몰아치는 폭풍의 광란을 드러내게 한다.
동시에 이런 성스러움을 내보임으로써 “탄생과 죽음, 재난과 축복, 승리와 굴욕, 존속과 쇠망”이 인간이 받아들여야 할 운명으로 드러나게 한다. 『일리아드』의 위대함도 신들의 싸움을 묘사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는 감춰져 있던 인간 삶의 또 다른 비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심원한 철학에 내가 뭔 말을 더 덧붙일 수 있으랴? 단지 하이데거가 예술에 대해 이렇게 근원적이면서 아름다운 질문을 던진 사람인데 어떻게 히틀러의 전체주의에 동조했는가 하는 점이 늘 궁금했다.
하이데거는 1933년 나치당에 입당했고,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 시절 학생들에게 나치당 가입을 독려한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에서도 식민지 조선에서도 하이데거는 아주 높은 인기를 누린다.
나치는 독일의 순수한 혈통과 순결한 땅이 유대인의 더러운 피로 오염된다는 식으로 선동했다. ‘피와 대지’는 하이데거의 중요한 개념이다. 피와 대지는 하이데거가 얘기하는 ‘존재’를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뒤흔드는 힘인데, 그건 한 민족의 정신세계이기도 하디.
독일인들은 게르만족이 그리스인들과 친족관계라고 주장하면서 인종적‧문화적 유사성을 찾는 데 열을 올린다.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이 논리는 히틀러의 아리안 족 주장이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자라난다.
독일은 그리스 문화서 다른 문명권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신적 우월성을 찾아내고 이를 이상적 규범으로 삼고 자신들을 이의 계승자라 생각한다. 18세기 독일의 미술사가 빙켈만은 그리스 대리석의 흰색을 유럽의 흰색으로 연결하고, 이는 후일 아리안족의 피부색으로 연결된다.
하이데거의 파르테논 사랑을 순수한 것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듯싶다. 파르테논은 고대 그리스인 또는 인류가 낳은 위대한 건축예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