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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의 ‘학생’과 ‘민족 대표’들

by 양문규

1919년 3·1 운동 당시 애초 독립시위운동을 준비해 나간 주체는 종교단체를 대표하는 33인이지만, 종교단체만으로는 전국적 반일운동을 조직하고 전개할 수 없었기에 이들은 학생대표를 포섭한다. 운동 초기에는 바로 이 청년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는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와 관련돼 정재용이라는 학생 출신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가 알려져 있다. 황해도 출신 정재용은 1911년 서울의 경신학교를 졸업했다. 경신학교는 언더우드 등의 선교사들이 관계돼 설립한 미션스쿨이다. 이 학교 출신으로 김규식, 안창호 등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졸업 후 고향인 해주로 돌아가 집안 과수원 일을 돌보던 중, 해주서 교회 활동을 같이 하던 YMCA 강사(박희도)가 그에게 3.1 운동 거사 날짜를 알려준다. 그는 서둘러 상경을 했으나 시위 지도부가 무장 충돌을 염려해 탑골 공원에서의 거사 계획을 수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탑골공원을 나갔는데, 그와 비슷한 심정을 가진 학생들이 공원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팔각정 중앙에 서 있던 정재용 자신에게로 그들의 시선이 쏠리는 걸 알아차렸다. 정재용은 얼떨결에 자신의 주머니 속에 있던 독립선언서를 꺼내 낭독했다.


그가 갖고 있던 선언서는, 민족대표의 한 명인 김창준 전도사가 서울에 와있던 원산교회 전도사에게 전해주라고 정재용에게 건네준 것인데, 그중 남은 한 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재용의 행동은 전국적 단위에서 3·1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3‧1 운동은 결국 수도 서울 청년 학생의 주도적 역할로 그 막이 올랐던 셈이다. 서울, 평양 이외에 남포, 안주, 의천, 의주, 원산 등의 지방에서도 3월 1일 거의 같은 시각에 대중적 독립시위 투쟁이 전개된다. 지도부는 비폭력을 의도했지만 학생들은 폭력을 상정했던 듯싶다.


더욱이 3월 5일 이후 조선 각지의 사립학교는 일제히 문을 닫고 관‧공립학교는 동맹휴교를 단행한다. 동맹휴교에 이어 이때부터 서울의 조선인 상점이 일제히 철시하기로 결의하고, 지방 도시도 이에 행동을 같이 하여 장기적 철시에 들어간다.


정재용의 일화는 구체적 사실 여부를 떠나서 하나의 상징적인 이야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학생 세력이 민족대표의 활동과 무관하게 움직인 것은 아니지만, 초기 단계에서부터 이미 독자적 민중운동을 구상하고 추진한 흐름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시간이 흘러 해방 후 1946년 제1회 3‧1 기념 연극대회가 열렸다. 극작가 함세덕의 희곡 『기미년 3월 1일』이 무대에 오른다. 함세덕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민족대표들 중에서 당시 생존했던 자들과 3‧1 운동에 관계한 남녀학생 주모자 이십 여 명을 직접 방문해 인터뷰했다.


그의 작품에는 3‧1 운동 당시 학생들의 움직임을 우려하는 민족대표들의 대화가 그려진다.

함태영: “독립을 선언해서 일본과 정면충돌할 게 아니라 독립탄원서를 내서 한번 청원을 해보면 어떨까요? … 단 선언을 하게 된다 해도 어디까지든지 무저항주의로 나가십시다.”


이승훈 : “민족자결이란 우리가 우리 힘으로 민족에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는 건데, 탄원(청원)이란 무슨 비겁한 짓이란 말이요? … 오늘까진 우리가 계획하고 민중을 지도해 왔지만 오늘부턴 민중이 오히려 우리를 끌고 가게 된 것 같소. 그러니 민중 속으로 우리가 들어갑시다.”


최린: “(이승훈의 앞을 막아서며) 지금 나가시면 우리가 기도했던 무저항의 저항이 아니라 폭동의 저항이 됩니다. 이건 우리들의 본의에 어그러지고 독립선언문 공약 제삼 장의 씨인 일체 행동은 질서 정연하게 하자는 말에도 상치됩니다.”


송진우: “일본 놈 경찰이 원체 지독하니까 섣불리 했다간 성사도 못하고 고연히 희생만 당하지 않을까요? … 이번 일에 실패하면 학교가 폐교가 돼 육백 명 학생이 노두에 나오게 되면 교장 된 자로서 그 책임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좀 더 신중히 생각해서 행동코자 합니다.”


최남선: “나는 정치운동에 가담해서 혁명가로서 서는 것보다, 그저 문필가로서 일개 학자로서 입신하고 싶으니까. 그러니 서류를 작성한다든가 선언문을 기초한다든가 하는 건 전적으로 내가 담당하되, 실제에 있어 민족대표에 가담하는 것만은 빠졌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민족대표는 아니지만 윤치호는 1919년 3월 2일 그의 일기에서 3‧1 운동에 대해 이렇게 쓴다. “이 어리석은 소요는 무단통치를 연장시킬 뿐이다.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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