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롱이의 모든 것
이사를 하고 3년 가까이 개를 키우지 않았다.
개를 키우지 않으니 집안은 깨끗한데 이따금씩 왠지 모를 공허함이 밀려들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여간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를 비롯한 가족 누구도 개를 다시 키우자는 말은 하지 못했다. 비슷한 마음이었을 텐데도 누구 하나 솔직하게 마음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다 언젠가 동생이 엄마에게 넌지시 개 한 마리 키우자고 했다가 펄쩍 뛰는 바람에 쏙 들어가버렸다. 엄마도 사실은 개를 키우고 싶어 할 텐데도 왜 그렇게 펄쩍 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개를 키우게 되면 신경 쓸 것도 많고, 지난날 엄마가 얼마나 힘들 게 개를 키워왔는지 아니 두 말도 붙이지 못하는 것일 테다. 무엇보다 엄마는 늙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힘에 부칠 나이가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쓰는 건 딱 질색인 성격이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초겨울의 추위가 막 감돌기 시작할 무렵 둘째 사촌 고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개를 키우지 않겠냐고 하는 것이다. 대체로 그런 묻는 말은 정말 묻는 말이 아닐 때가 많다. 강아지를 주겠으니 잘 키워보란 말의 완곡어법인 것이다. 그 고모는 작은 체구에 붙임성이 좋았지만 대신 사람을 물면 여간해서 놓지 않는 끈질김과 집요함이 있었다. 물론 우리 집이 워낙에 개를 좋아하고 잘 키우는 것을 알기에 그러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겠다는 강아지는 고모의 딸이 키우던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다 분양을 하고 한 마리가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생각했던 건 당연했다. 역시 개를 키우던 집은 어떤 운명으로든 다시 키우게 마련인가 싶기도 했다. 그렇게 되니 엄마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일 수밖에.
고모가 그 강아지를 데려 오던 날 나는 집에 없었다. 교회 모임에 참석했다 밤에 집에 돌아와 보니 고모는 가고 없었고, 이제 겨우 발을 떼기 시작한 강아지가 꾸물대고 있었다. 그게 바로 다롱이었다. 순간 어두웠던 집에 불이 켜지는 느낌이었고 집안 공기가 달라졌다. 또 그건 동시에 개 육아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다롱이를 키우자 예전에 잠재되었던 것들이 다시 발현되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제니에게 지지배라고 부르던 습관이 무의식 중에 튀어나왔다. 그땐 제니가 죽은 지 3년이 넘었고 다롱이는 수캐인데도 말이다. 물론 후에 다롱이는 가끔 짜아식 또는 짜샤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우린 다롱이에겐 사료를 먹였다. 그렇다고 사료만 먹였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롱이가 마지막까지 가장 좋아했던 간식은 건빵이었다.
다롱이가 가장 좋아했던 사람은 엄마와 나였고, 동시에 가장 만만하게 여겼던 사람도 엄마와 나였다. 원래 사람이나 짐승이나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만만한 존재다. 그런데 비해 동생은 좋아하면서도 어려워했다. 그런 것을 보며 엄마는 여자는 동물조차도 우습게 본다며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다롱이가 가장 무시했던 건 의외로 오빠였다.
어쩌면 그리도 오빠와는 사귀질 못했는지 녀석은 항상 남의 집 사람 보듯 했고 가끔은 짖을 때도 있었다. 그건 또 그만큼 오빠가 다롱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오빠는 늘 말이 없고 집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했으니 다롱이도 속으로 순위를 매기지 않았을까. 예전에 미키가 나를 만만히 봤던 것을 생각하면 개들도 역시 제 주인에 대한 호불호가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다롱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것에 감지덕지해야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러면서 개 집사로 거듭났는 건가 싶기도 했고.
다롱이는 확실히 우리가 키우기엔 좀 버거운 데가 있었다.
그나마 예전처럼 넓은 개인 주택이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요크셔테리어 종이 원래 활동성이 좋고 예민하다고 하던데 다롱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밤엔 그나마 곯아떨어져 자니 다행이긴 하지만 낮엔 오래 깊이 자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집 안팎으로 무슨 기척만 있으면 무조건 짖기부터 했다. 하다못해 우리 집은 1층에 있는데 밖에서 누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발소리가 들리기만 해도 짖기부터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놀라 진정을 받기도 했다. 뭐 어른은 그런다고 쳐도 어린아이가 놀라 자지러지면 얼마나 미안하고 난감한지. 그뿐이 아니었다.
택배가 오면 일단 녀석을 방에 가두고 물건을 받아야 한다. 안 그러면 택배 기사에게 달려들어 어떤 위해를 가하게 될지 몰랐다.
이러다 보니 다롱이가 오고 몇 년 동안은 내가 데리고 자기도 했다. 혹시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밖에서 사람들의 발소리를 듣고 짖어댈까 봐. 하지만 실제로 다롱이는 때를 아는지 아침 일찍은 별로 짖지 않았다. 그래도 난 다롱이와 함께 잠을 자고 깨는 것이 좋아서 항상 데리고 잤다.
몇 번 훈련을 시켰더니 '파블로브의 개'가 되어서 밤이 이슥해지면 어김없이 화장실을 들렀다 내 방으로 들어 와 본격적인 밤잠을 자곤했다. 하다못해 새벽에 화장실을 가도 다른 곳으로 안 가고 내 방으로 다시 들어와 잤다. 그리고 아침에 잠에서 깨면 녀석은 내 손길이 필요한지 드러누운 내 배에 앞발을 올려놓고 쓰다듬어 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난 그게 참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해, 무척 더운 여름날 밤 방문을 열어 놓고 잤더니 처음 몇 번은 들어와 자는 척하더니 새벽이면 어느 길에 나가고 없었다. 그러자 이제는 불러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좀 섭섭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개는 역시 사람보다 열이 많아서 그런지 폐쇄된 공간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개라도 방에서 자는 건 싫을 것이다. 그동안 잘 견뎌줬지 하며 어디든 다롱이가 자고 싶은 데서 잘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한창때 다롱이는 한 가지 묘기가 있었는데 그건 거실에 있는 엄마의 높은 침대를 나르듯 앞발을 벌리고 붕 뛰어오르는 것이다. 마치 날다람쥐가 착지를 하듯이 말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대견하고 우습던지. 물론 그전에 다롱이가 안전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방석 같은 걸로 바닥을 두툼하게 깔아 도약대를 만들어 준 결과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미안한 건 다롱이를 많이 산책시켜 주지 못한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반려견에 대한 관리를 엄격하게 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 같은데, 다롱이를 처음 입양했을 때만 해도 녀석을 매일은 고사하고 자주 산책을 시켜야 한다는 생각조차 별로 없었다. 산책을 시켜준다면 고작 친척이나 출가한 언니가 왔다갈 때 엄마가 배웅 삼아 안고 공동 마당이 있는 곳까지 나가 주는 것인데 녀석은 그 순간을 몹시 즐겼다. 아니면 동물병원이나 가야 코에 바람을 넣거나. 하지만 그것도 녀석이 사는 동안은 대체로 건강하게 살았기 때문에 별로 기회가 없었다. 그나마 녀석은 여름날 베란다의 문을 열어 놓으면 항상 그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곤 했다.
하루는 녀석이 발에 빨간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피가 나올 데가 없는데 왜 그러나 했더니 엄마가 조그만 고추장 단지의 뚜껑을 열어 뒀는데 녀석이 베란다 창으로 바람을 쏘인다고 하다 그곳에 발이 잘못 빠진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피가 아니라 고추장이었던 것. 고추장은 왜 빨개 가지고.
그렇다고 다롱이를 키우는 것이 마냥 즐겁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개 한 마리를 키운다는 건 아기를 키우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기는 그래도 크면서 제 앞가림이라도 하지, 개는 죽을 때까지 주인이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다롱이는 사료를 먹어서일까 장 운동이 좋아서 하루에 평균 3번 많을 땐 4번의 변을 보곤 했다. 또한 수시로 싸 대는 오줌까지. 이건 보통 엄마와 함께 치우긴 하는데 화장실을 자주 가는 내가 치울 때가 더 많았다. 그러면 어떤 땐 짜증이 나기도 하고 한숨이 나기도 하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거야 말로 정말 인내가 필요한 일인 것 같다. 가장 기본적인 일인데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그렇다고 개 똥만 치우고 살아야 한다니.
역시 개 집사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