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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지하다 Jun 21. 2023

누가 잠자는 승무원의 인터폰을 건드리는가

어느 승무원의 수면 에세이

승무원이라는 직업에 있어서 ‘잠’은 정말 중요하지만 특히나 비행 가기 전과 다녀와서의 잠은 승무원 인생의 퀄리티를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시차가 크게 바뀌는 인터컨티넨탈(대륙 간 이동) 비행을, 11시간이 넘는 밤비행으로 정면돌파해서 돌아온 후에 자는 잠은,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모르고 푹 잘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


하지만 많은 승무원들이 그렇게 잘 자진 못한다. 아마 정말로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은 감히 세상이 내린 승무원의 재목이다. (물론 세상엔 다른 무수한 교대 근무와 야간 근무 일들도 있지만 이만큼 불규칙하고 시간대를 자주 넘나들며 잠을 잘 주물러야 하는 직업은 파일럿 정도가 양대산맥인 것 같다. 문득 이 정도로밖에 못 떠올리는 내가 우물 안 개구리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같은 고생인데 급여 차이가 많이 나니 신이 내린 잠의 신동이라면 후자를 추천하는 바입니다.) 물론 세상이 당신에게 ‘Dormisis‘ 또는 ’slaapidite’ (‘”글있으“ 신화 속 잠의 여신‘)과 같은 능력을 주었다 해도 친절한 서비스 마인드와 불쾌감을 주지 않는 외모 정도는 계속 발전시켜야 하지만, 어디에서든 언제든 잠을 잘 잘 수 있다면 당신은, (과장을 3할 더해) 승무원을 천직으로 고려해도 괜찮다.




딱 이 점만 두고 생각하면, 난 승무원으로서 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내 피부와 튼튼한 종아리, ‘하십시오체’를 잘 사용하지 못하는 어딘가 어눌한 말투 등을 모두 제외하고, ‘잠 컨트롤 능력’으로만 보면 나는 승무원계의 스티브잠스라고 늘 자부해 왔다. 벙커에서 한숨도 못 잤다는 크루들을 보면 안타깝지만, 머리만 대면 자는 나는 사실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그 고통을 가늠할 수 없다. 그렇다고 경험해 볼 바엔 그냥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쪽을 택하겠다.


실제로 지난 5월 31일, 평화롭기 그지없는 새벽녘의 서울에 사이렌 오경보와 핸드폰 재난 경보가 울린 날도,  난 세상모르고 오후까지 잤었고 다시 한번 나 스스로를 ‘하늘이 낸 승무원의 재목‘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전날 장거리 비행에서 돌아온 탓(덕)이었다.


카타르에 살 때도 이례적으로 지진이 나서 모두 건물에서 대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나는 자고 일어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았고, ’왜 내 룸메이트는 나를 깨우지 않고 혼자 대피했을까…?’라는 생각으로 딱 하루동안 괴로웠었다.




그러나! 이 모든 역경과 고난을 뚫고 잠의 슈퍼히어로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던 나에게, 드디어 1패를 당하는 날이 왔다. 바로 오늘; 12시간 밤비행을 마치고 유럽에서 돌아온 날. 집엔 보통 오후 2,3시쯤 도착하는데, 한국에 도착한 날 나는 절대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룰이

있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최대한 버티다가 아주 이른 저녁 7시쯤 침대행을 택한다. 나에게 최고의 프로포폴은 장거리 밤비행. 그러면 최소 다음날 오전 11시까진 잘 수 있다. 그렇게 자고 나면 따로 시차적응은 필요 없다.


오늘은 처음으로 룰을 깬 날이었다. 랜딩하고 바로 샤워를 하고 부랴부랴 무려 홍대에 갔다. 힙한 젊은 애들 사이에서 에너지를 받기보단 오히려 기 빨린다고 최근에 스스로 재정의한 곳. 요즘 듣게 된 수업이 있는데 빠지기가 아까워, 눈 뜬 송장처럼 수업을 듣고, 마침 퇴근시간 18시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왔다. 홍대와 지옥철에서 없던 기마저 탈탈 털린 뒤 집에 오니 18시 30분. 19시도 못되어 바로 침대에 기절했다. 그리고 나는

극락의 마수에게 빨려 들었다. 핸드폰은 잘 때는 무조건 무음. 진공처럼 느껴지는 이 시간 속에선 진동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여자의 목소리… “경비실에서 호출이 옵니다” 이어지는 띠링띠링…


지진과 사이렌 경보도 이겨낸 내가 인터폰 소리에 무너졌다. 너무 선명하고 가깝게 들리던 소리… 이곳은 비롯 5.5평 작은 원룸이지만 오롯한 나만의 공간이라는 마음의 평안을 철저히 부셔주던 소리. 인터폰의 소음적 성격으로서의 데시벨이나 잠을 깨웠다는 사실보다 ‘나만의 공간’이 상징하는 바를 무너뜨리고 예고도 없이, 내겐 지극히 은밀한 시간에 ’훅!‘ 들어왔다는 사실에 더 짜증이 났다. 잠이 잔뜩 묻고 짜증은 더 묻은 상태로 ‘통화’를 누르니, 경비 아저씨께서 밖에서 언뜻 보이길 실외기실 창문을 제대로 활짝 안연거 같으니 화재 위험상 꼭 활짝 열라고 하셨다.

아 이런… 에어컨을 켜둔 채 자고 있었다면 아저씨가 덜 원망스러웠을까? 실외기실 창은 활짝은 아니어도 90%는 열어두었는데… 시계를 보니 지금 시각 21:30분, 나름 늦은 시간이라는 걸 알려드렸다면 속이 후련했을까.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것보다 장거리 비행 후 잠자는 승무원의 고막을 건드리는 것이 더 큰 실수하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의 안전을 생각하시고 건물 모두의 안전을 위하여 자신의 책임을 다하시던 70은 족히 돼 보이는 경비 아저씨께 다만 “네. 지금 에어컨 끈 채로 자고 있으니 내일 확인할게요. “ 하고 끊었다.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니 나도 안전벨트 표시등이 켜지면 곤히 자는 승객들을 깨워 안전벨트를 하시라고 말한 적이 여러 번 있다. 물론 잠자는 승객들을 깨우는 건 마음이 편치 않다. 하지만 나는 그저 나의 주어진 임무를 다 할 뿐이다. 행여 수직낙하라도 와서 머리라도 다친다면, 평생 주무셔야 할 수도 있으니 5초 깨워서 5시간의 안전을 추가로 드리는 것이 위험 대비 고수익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경비 아저씨께 감사한 맘이 든다. 처음으로 자다 깨서 브런치에 글을 써 내려가게 해주 신 것도. (다시 빨리 자고 싶은 마음에 황급히 글을 마치는 티가 났다면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길)


장거리 비행에서 어깨 기댈 곳 되어주는 소중한 벙커(보잉777-200). Slaap lekker는 네덜란드어로 ‘꿀잠자‘인데 누군가 모두의 침대를 준비해주고 스윗한 메모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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