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도로 식사할 때 진짜 식사가 시작된다
휴직 후 일상에서 가장 달라진 부분이자 가장 만족도가 높은 일 중에 하나는 밥을 천천히 내 속도로 먹을 수 있게 된 점이다. 회사에서는 점심을 10분 만에 먹어내느라 매번 속이 더부룩했는데 집에서는 혼자서 밥을 먹으니 30분이든 한 시간이든 내가 원하는 시간만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천천히 떠서 꼭꼭 씹어먹을 수 있었고 오롯이 맛에 집중할 수 있었으며 가끔 딴생각도 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식당에 앉자마자 숟가락을 들고 공격적으로 음식을 입으로 떠 넣어야 했기에 맛을 느끼고 식사를 즐기기보다는 10분 안에 식판 안의 음식을 다 먹어야 하는 미션을 매번 수행했다.
우리 팀의 평균 점심 식사시간은 10분 내외다. 팀원들 중에는 식판에 담은 밥과 반찬의 양이 내 것의 두 배가 넘는 사람도 있었지만 식사는 10분이면 충분해 보였다. 나는 다년간의 짬밥으로 오후에 배고프지 않으면서도 팀원들 식사 속도와 맞출 수 있는 내 식사량을 발견했다. 때문에 특식이 나와도 욕심부리지 않았다. 나는 제한된 시간 내에 내가 먹을 수 있는 양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양과 그 식사 속도가 나에게 맞는 것은 아니었다. 환경에 적응한 최적의 비율일 뿐 내 몸에 맞는 식사 속도는 아니었기에 식사 중에는 늘 바빴고 말을 삼가했다. 말을 하게 되면 그만큼 씹고 삼킬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기에 나는 주로 듣기만 했다. 그러나 식사 후에는 늘 속이 더부룩했고 그렇게 갑갑한 기분으로 오후 업무를 시작했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나는 유난히 밥 먹는 속도가 느렸다. 고등학생 때는 급식당번이 급식 배급차를 다시 수거할 때까지 밥을 먹었다. 그때는 때마침 짝꿍 역시 밥을 나만큼이나 천천히 먹는 아이라 같이 점심시간을 오롯이 밥 먹는데만 사용했다. 그리고 집에서도 나는 매 식사 때마다 제일 늦게 일어나는 아이였다. 심지어 명절에 친지들이 다 모여 먹는 대식구 밥상에서도 나는 제일 늦게 식사를 마쳤고 엄마는 그 일이 익숙하다는 듯 나를 두고 빈그릇을 챙겨나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보고 친지들 중 누군가는 천천히 먹으면 건강에 좋겠다고 했고 누군가는 식사하는 동안 소화가 다 될 것 같다고 했다. 여하튼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꽤 천천히 식사하는 사람이었다.
이랬던 나는 회사에 들어가면서부터 식사를 빨리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인턴으로 출근했던 첫 주의 식사시간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식판을 받아 밥을 먹기 시작하는데 내가 세 숟가락쯤 먹었을 때 주위에 앉아있는 팀장님, 과장님, 대리님, 그리고 동기마저도 그들의 급식판에서 마지막 숟가락을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남은 음식을 재빨리 먹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리 빨리 먹어도 10분 이상 걸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수저를 내려놓았다. 과장님이 왜 더 먹지 않느냐 했지만 나는 속이 조금 안 좋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나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를 들어야 했다. 퇴근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배가 너무 고팠다.
다음날은 조금 더 빨리 식사를 하려 노력했지만 마찬가지로 대여섯 숟가락쯤 떠 넣었을 때 팀원들은 모두 식사를 마친 듯 보였다. 과장님과 대리님은 천천히 먹고 오라며 동기만을 남기고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식사 속도가 다른 것은 서로가 불편한 점이었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도 떠나지 못하는 팀원들에 신경이 쓰였고 팀원들은 그런 내가 식사를 급하게 할까 봐 염려되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팀원들의 식사 속도에 맞추는데 꽤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다녔던 회사는 조선/중공업 산업군의 회사로 전체 직원 중 95%가 남자 직원인지라 나는 계열사와 부서이동을 여러 번 하는 과정에서도 매번 팀 내 유일한 여자 직원이었기에 치우친 성비만큼이나 항상 밥 먹는데 어려움을 느꼈다. 군대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평균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식사속도가 빨랐던 경험에 비추어보면 성비가 균형을 이루는 회사나 여자가 많은 직장을 다녔더라면 이토록 식사 속도에 힘들어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 우리팀은 그 누구도 식사 속도와 시간에 어떠한 불편함도 내보이지 않는다. 또래의 누군가가 우리팀의 식사 속도가 빠른것 같다고 한번 언급한 적은 있지만 그게 다였다. 나는 우리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차부장님들의 식사 속도에 맞출 수 밖에 없었다.
휴직 후 나는 내 식사 속도를 다시 찾았다. 물론 학창 시절의 속도로 다시 돌아가지는 못한다. 다년간의 사회생활로 이미 입속에서 몇 번 씹지 않고 꿀꺽 넘겨버리는 식사 방법에 적응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휴직 초창기에는 혼자 먹는데도 회사에서의 식사 속도와 비슷했다. 하지만 차츰 내 속도를 찾게 되자 식사하는 즐거움이 커졌고 더 이상 식사 후 속이 더부룩하지 않았다. 게다가 먹는 양도 현저히 줄었다. 아무래도 천천히 식사하다보면 적은 양으로도 포만감이 커진다. 보통 식욕 억제 호르몬이 식사 후 15~20분 후부터 나온다 하니 최소 20분 이상 식사를 하면 그보다 짧게 식사를 했을 때보다 같은 식사량에 포만감을 훨씬 많이 느낀다. 그래서인지 학창 시절 나는 미국에 있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살이 잘 찌지 않았다. 그리고 많이 먹지도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많이 먹었고 먹으면서도 배부르다는 생각을 잘 못했던 것 같고 살이 잘 쪘다. 물론 대중교통 대신 자차를 이용하면서 활동량이 줄어든 이유도 있겠지만 식사속도 역시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확신한다.
휴직기간이 끝나고 다시 회사로 복귀하게 되면 나는 팀원들과 따로 식사를 할 생각이다. 다시 팀원들 속도에 맞추느라 속이 더부룩해지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을 예정이다. 팀 화합이라는 이상한 미명아래 다수의 식사습관에 나를 끼워 맞추면서 나의 소중한 식사 시간을, 내 몸을, 내 건강을 더 이상 희생하지 않을 생각이다.
*사진출처: Pixabay-bujob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