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 상품이지만 내년까지 보관해 두었다가 입어야 할 만큼 시즌이 지나서 못 입을 옷은 아니다.
다만 옷가게는 늘 시즌을 앞서가기에 지금 입을 수 있는 옷이어도 세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는 그렇다. 그리고 묵은 재고를 남겨두지 않는다. 세일해도 안 나가고 남는 옷은 기부하거나 단골손님들에게 끼워 주기도 하면서 재고를 안 남겨 두기 때문이다.
"그 금액으로 드리는 것은 파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드리는 거나 다름없어요."
"어쨌든 이렇게라도 팔아서 현금화하는 게 낫지 않아요?"
참으로 당황스러운 말이다. 나의 현금 사정까지 걱정하는 사람이 원가 이하로 손해 보면서 달라는 것이다. 실제로 악순환을 겪는 작은 가게들은 이런 식으로라도 팔아서 단돈 얼마라도 현금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 돈으로 새 물건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세일을 하기도 한다. 원가는 도매로 구매해 온 가격이 아니다. 가겟세, 전기세, 화물비, 경비보안업체 비용, 가게 운영에 필요한 기타 잡비(생수, 커피, 음료, 생필품 등등), 그리고 상가의 경우는 상가 관리비. 주차비등도 포함된 것이 원가이다. 그리고 밤에 잠 안 자고 물건 고르고 주문하는 옷가게 주인장의 인건비가 나와야 하는데 인건비까지는 못 받더라도 원가는 그렇게 계산되어야 한다. 하지만 시즌이 끝나가고 재고 많을 때는 '원가 이하'라는 말을 붙이고서 세일을 한다. 정말 원가 이하가 맞는데 '그래도 남는 거 아니냐'는 말을 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도매가격이 원가가 아니다.)
상인들의 어려움을 기회로 더 싸게 가져가려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알뜰하게 쇼핑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물론 다른 사람의 위기가 기회이기도 하며 이렇게 알뜰하게 쇼핑하는 사람도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지만 남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하는 알뜰함은 결코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손해 보고는 못 드립니다. 차라리 기부하는 게 나아요."
어떤 손님은 웃으면서
"저한테 기부하세요"라고도 했다. 물론 농담이 맞기에 나도 웃으며 받아준다.
그렇다고 나 역시 모든 세일 상품을 이런 식으로 하지는 않는다. 단골손님들에게는 그냥 끼워주기도 하고 세일 상품이 아닌 것도 기분 좋으면 미리 세일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유난히 비위를 거슬리게 하는 손님에게는 정말 1도 주기 싫은 경우가 있다. 너무 기분 상하게 했던 손님에게 팔지 않고 '기부합니다'라고 했던 나와의 약속대로 다른 손님에게도 팔지 않고 내가 기부하는 곳에 기부하기도 했다.
photo by sugar
정말 옷을 사 입기도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은 옷가게에 들어오는 것조차 망설인다. 그리고 막상 들어왔는데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비싸 보일 때 가격만 물어본다. 선뜻 입어봐도 되냐는 말은 못 한다. 가격이 안 맞아서 못 사기 때문에 입어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애초에 진상 손님도 못 된다. 가격만 물어보고 가는 것을 미안해하며 머뭇거리면서 '다음에 올게요' 하고 나간다.
옷가게들이 몰려있는 상가 안에 있을 때는 이런 손님들이 더러 다녔다. 지나가면서 세일하는 옷이나 이월 상품 중에서 고르기도 했는데 꼭 필요한 옷만 사면서 눈치 보느라 더 깎아달라는 말을 못 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오래 하다 보니 대충 눈치로 알 수 있는 손님들에게는 알아서 적절하게 할인을 더 해주었다. 철도 지났는데 더 깎아달라는 말은 생각도 못 하는 사람들이다.
가게를 이전 한 이후 이 곳에서는 상가지역에서 처럼 세일 상품이나 매대의 물건을 득템 하기 위해 오는 손님이 많지 않다. 상가 안에는 몰려있는 가게들을 큰 부담 없이 오며 가며 드나들기가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로드숍은 혼자서 그냥 구경하느라 선뜻 들어오기에 어색하며 문턱이 좀 높다고 느껴질 것 같다. 예전의 나도 혼자서 낯선 옷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물건 값을 깎고 싶은 심리는 누구나 다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조금이라도 더 깎고 싶어 하며 할인해주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쉽게 하지는 못한다. 성향이 다르다 보니 생각 없이 그냥 던지는 말이나 행동이 상대방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 것인 줄 모르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대부분의 손님이 악의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행동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손님과 오히려 친밀해지면서 나의 원칙에 들어오도록 만들어가는 것도 주인장의 능력이라 생각한다. 익숙하고 편해진 손님들과의 관계만 생각하다 보니 새롭게 만나는 손님들의 남다른 성향에 당황하고 피곤했던 것이다. 이제는 그런 일로 흔들려서 다음 손님이 오셨을 때까지도 얼굴이 굳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photo by sugar
장사 시작한 이후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은 적은 처음이다. 코로나 사태부터 최근에는 오랜 장마까지 이어지니 기분 좋게 옷 구경을 오는 손님들이 많이 없다. 누구라도 손님은 오신다면 귀한 사람이다.
며칠 전에는 손님인 어느 동생과 영화 <극한직업> 속 주인공들의 대화를 이야기하면서 웃었다. 몇 년 전 정말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였다.
'미래가 안 보이는 월급쟁이와 노후자금까지 날리게 생긴 소상공인이 주인공이라
목숨 걸고 달려갈 수밖에 없다'
대충 이런 내용의 대화였는데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공감하면서 웃겼지만 딱 지금 우리들의 힘든 현실이 그대로 담긴 명대사이다. 아무리 작은 가게라도 노후자금을 들여서 시작한 소상공인이거나 퇴직정년이 보장되지 않은 직장인이나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직장인들. 그리고 지금 딱 내 또래의 가장들의 가장 큰 고민인 명퇴냐 버티느냐 하는 이야기를 접할 때 결코 내 일이 아니어도 온전하게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단골손님들의 어려움을 알고 나면 '과연 내가 옷을 자꾸 권할 수 있을까?' 어려운 시기에 손님들의 소비를 부추기는 옷장사라니.. 이런 생각으로 힘들 때도 있었다.
그나마 꾸준히 오시는 손님들은 직장이 있거나 꼭 필요한 옷을 구입하기 위해서 오시는 분들이다. 이럴 때는 나도 하나쯤 입어보고 싶은 그런 옷보다는 직업을 가진 주부들과 전업주부들에게도 꼭 필요한 아이템 위주로 옷을 준비하게 된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그냥 예뻐서, 기분 풀자고, 덜렁 하나 사 입는 손님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 가게 단골손님들은 대부분이 알뜰하고 검소하고 슬기로운 소비생활을 하시는 분들이다. 그녀들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쇼핑하지 않으며 비싼 브랜드 옷을 즐기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어서도 백화점이나 쇼핑몰을 돌아다니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들에게 꼭 필요한 옷가게라고 늘 자부한다. 오며 가며 많은 사람이 들어오지는 않아도 오랜 세월 그녀들이 믿고 찾아와서 편하게 쇼핑할 수 있다고 하니 그 보람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 업종이 다른 소상공인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가짐 일 것이다.
하지만 특히 생계형의 소상공인들은 극한직업 속 대사처럼 목숨 걸고 달리듯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요즘 현실이다. 물론 극소수 여전히 잘 되는 가게들은 어디에나 있지만..
직장인이든 자영업자든 요즘 우리는 모두 극한직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나마 직장이라며 출근하며 일을 가진 사람이 부럽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