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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Jan 30. 2020

언박싱 영상 대신 언박싱 글

  나는 자타공인 평소에는 크게 물욕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해외에만 오면 그렇게 사재기를 한다. 한국에서 사 입지 않는 옷들, 사려고 벼르고 있던 생필품들, 가전제품들, 여행기념품들, 화장품들 종류도 가격도 다양하다. 이미 내가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멕시멀리스트라는 것은 앞에서 밝혔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나는 이번에도 참 많은 것들을 사고 또 사버렸다. 가져온 캐리어가 짐을 다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일 것 같다는 판단에 엊그제는 화물용으로 부칠 수화물을 삼만 오천원주고 하나 더 추가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나와 남편의 손에는 개수를 밝히기 민망할 정도의 많은 짐이 들려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또 얼마나 낑낑대며 그 짐들을 이고, 지고 갈 것인가.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오늘은 내가 구입한 물건들 중 꼭 마음에 드는 몇 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언박싱 영상이나 파우치, 가방 속 물건을 소개하는 영상과 같이 그냥 심심풀이로 스윽 흘러 읽으셔도 무방할 것 같다. 남들은 해외 가면 뭘 사는지 궁금해하는 나같은 사람들을 위해 쓰는 글이니, 그렇지 않은 분들은 가볍게 이 페이지를 넘기셔도 된다.
 
  잘 산 아이템 첫 번째는 덴마크 국립 미술관에서 구입한 어느 덴마크화가의 포스터이다. 작가는 Martinus Rorbye, 작품명은 영어로(원제는 덴마크어) View from the Artist’s Window, 1825(예술가의 창문을 통해 바라본 풍경) 이다. 이름이 다소 생소한 이 작가는 찾아보니 19세기 중반 덴마크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풍경화와 장르화 위주의 화가이다. 이 그림에는 북유럽의 정적이고 차분하면서도 정제된 자연을 창문 너머로 조용히 관찰하는 낭만적인 작가의 시선이 담겨 있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정말 북유럽스러웠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와 조용히 그림 한 점에 남겨둔 작가의 시선이 좋았다. 북유럽의 노오란 조명을 닮은 톤 다운된 붉은 빛이 그림 전체에 얇게 스민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오빠, 우리가 또 언제 덴마크에 다시 올 수 있겠어. 아마 덴마크에 올 비용으로 다른 안 가본 나라를 여행하지 않을까? 이 그림은 누가 봐도 덴마크잖아, 어때?” “좋아, 우리 집 색깔이 전체적으로 골드빛이니까 저런 풍경화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그런데 지난번처럼 와인병이랑 같이 넣어 두면 안 될 것 같아. 이 큰 그림을 어떻게 가져가지?”

  여행을 오면 쇼핑을 할 때 꼭 염두해 두어야 하는 것이 있다. 과연 내가 이 물건을 한국까지 잘 가져갈 수 있나 하는 문제이다. 크기가 너무 크거나, 잘 깨지거나, 보관이 힘든 것은 아무리 예뻐도 사기가 망설여 진다. 캐리어에 들어가지 않는 꽤 큰 사이즈의 이 포스터를 구김없이 완전한 상태로 집까지 잘 모셔가는 것이 관건이다. 사실 조금 걱정이 된다. 지난번 스페인의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샀던 커다란 포스터가 캐리어에 넣어둔 와인병이 깨진 바람에 고운 핏빛으로 물들어 있던 것이 기억나기 때문이다. 피를 철철 흘리며 인천공항 수화물 컨베이어 벨트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끄집어 내려지던 우리의 캐리어... 그걸 보는 사람들의 경악스러운 눈빛, 청소부 아주머니의 원망스러운 시선, 그리고 곱게 물들어 흐물거리는 그림 한 점과 핏빛 얼룩이 져버린 흰 운동화, 수많은 옷가지들... 이번에는 과연 무사히 잘 가져갈 수 있을까? 올해는 와인이랑 양주도 한 병 더 사서 캐리어에 넣었으니, 아무래도 이 그림은 내가 비행기에 직접 들고 타야 할 것 같다.

  나와 남편은 여행지에서 그림을 하나씩 사 모은다. 우리가 결혼을 했을 때, 각자의 짐 속에서 그 동안 사두었던 그림들을 발견하고는 ‘역시 우린 천생연분이야!’라고 생각했다.(남편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우리집에는 남편과 내가 그간 여행을 다니면서 하나 둘씩 사 모은 그림들이 많다. 그 중에 몇몇은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 두었다. 식탁 왼편의 벽 중앙에는 내가 영국에서 연수를 하던 시절에 자주 들렀던 글로스터셔 대성당의 그림이, 거실 쇼파 옆 간이 테이블위에는 런던 코톨드갤러리에서 샀던 모네의 그림 한 점이 놓여 있다.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재에 고이 모셔둔 그림만 족히 5점은 넘을 것이다. 서른평이 넘지 않는 작은 우리의 전셋집 벽면에는 그리 많은 그림을 마음껏 걸 수 있는 공간도 없고, 어쩐지 마음도 편치 않다. 그래도 꾸준히 그림을 사 모으는 이유는 언젠가 내 집이 생기면 나의 집에는 나의 추억이 남긴 그림들이 곳곳에 걸려 있으면 하기 때문이다. 그림 한 점이 주는 추억의 힘은 대단하다. 차 한 잔 마시면서 물끄러미, 빨래를 개다가 물끄러미, 식물에 물을 주다가 물끄러미, 시계를 보다가 물끄러미, 그리고 무엇보다 출근을 하기 전에 물끄러미 그림들을 바라보면 평범한 일상이 다시 여행처럼 특별해지는 기분이라 좋다. 그러면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일상을 살 수 있다. 잠시나마 가볍고, 너그럽고, 명랑해 질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저렴한 그림 한 점 값으로 무제한 여행티켓을 산 셈이다. 무려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는 지극히 주체적이고 제멋대로의 여행을!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께도 추천합니다. 원화의 이미지를 프린팅한 포스터를 사면 그리 많은 돈이 들지 않는답니다! 물론 원화를 살 돈이 있다면 훨씬 더 좋겠지만요.

  잘 산 아이템 두번째는 각종 차(tea)와 차관련 용품들이다. 한국에서는 차가 다소 프리미엄화 되어 있다보니 좋은 차를 구하려면 정말 소량을 구입해도 꽤 많은 돈이 나간다. 그만큼 차라는 것이 까다롭고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공정을 거치다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나는 차값이 좀 더 저렴하면 좋겠다. (특히 국산차의 경우에는 가격이 너무 비싸서 아무리 좋아해도 늘 손을 덜덜 떨면서 소량으로 사두고 아껴먹게 되니 사실 좀 속상하다.) 유럽에 오면 세계 각국에서 대량생산되는 다양한 종류의 차들을 합리적인 가격에 살 수 있다. 유럽하면 이 차라는 기호품 때문에 역사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왔다갔다한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무역전쟁이 시작되고,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한 노예무역이 성행하고... 많은 일들이 차의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유럽은 현재 술이나 커피만큼이나 차를 생활에 밀접하게 가까이 두고 즐긴다. 오죽하면 차 이름이 ‘영국인의 아침식사(English Breakfast)’이겠는가! 그래서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기회는 이 때뿐이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매번 장을 보러 갈 때나 쇼핑거리를 지날때마다 야금야금 차를 사 모았다. 특히나 이번 독일여행에서 꽂힌 차는 이름도 달콤한 ‘루이보스바닐라’이다. 티백도 사고, 티백을 예쁘게 정리해서 담을 티백 전용 틴케이스도 샀다. 차를 마실 때 필요한 머그컵 2개(이미 우리집에는 머그컵이 넘치고 넘칩니다. 두세개씩 마구 쌓아두었는데 늘 하나씩 꺼낼 때면 와장창 깨져버리진 않을까 아슬아슬 하답니다.)와 찻잔받침을 샀고, 차를 마실 때 깔아도 예쁠 행주겸용 식탁보도 4개 샀다. (4개에 만 이천원이면 득템아닌가요?) 그렇다, 나는 차를 아주아주 사랑한다.

  사실 이게 끝이 아니다... 13만원정도 주고 구매한 전기 티팟도 있다. 이번 여행에서 제일 거금을 들여 모신 것이 바로 이 녀석인데, 한국에서 유통되는 가격은 40만원이 훌쩍 넘는다. 커피머신으로 유명한 영국회사에서 만든 이 티팟은 일반적인 가정용 전기포트의 형태와 모양새가 비슷하다. 그런데 이 아이는 단순히 물을 끓이기 위한 용도가 아니다. 포트 중앙에 자석으로 된 티거름망이 있어 원하는 만큼의 티를 우려내어 두고두고 따뜻하게 먹을 수 있다. 또한 각 차의 특징에 맞게 적정 온도와 차 우리는 시간을 설정할 수 있는 버튼이 있어서, 차를 단순히 취미가 아닌 좀 더 전문가적인 영역에서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제품이다. (협찬 아닙니다.) 게다가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포트에 설정해 둔 차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티 거름망이 물밖으로 나와서 권장 시간보다 진하게 차가 우려질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기술의 발전이 정말 놀랍다. 남편은 이 제품을 발견하고서 “이야, 조금 있으면 인공지능이 알아서 차를 넣고 우려서 완벽한 차 한 잔을 내어줄 지도 몰라. 핸드폰으로 기계한테 차 한 잔 우려달라고 부탁하면 되겠다!”고 말했다. 정말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어느 비밀 연구소에서 누군가 열심히 발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만약 정말 그런 날이 오면, 나는 또 홀린 듯 그 아이를 손에 넣기 위해 가게 앞을 서성이겠지.

  사실 내가 차를 사랑하게 된 것은 남편의 역할이 크다. 남편은 내가 글을 쓰는 것과 더불어 더 많은 취미를 개발해주려고 노력한다. 특히나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것들을 잘 포착하여 내가 좀 더 전문적인 영역에서 그 취미를 개발하고 관련분야의 안목을 키울 수 있도록 격려한다. 그가 나를 이렇게 지지하는 것에는 우리 부부만의 개인적인 속사정이 있기는 한데, 주제를 약간 벗어날 것 같으니 여기서는 자세히 밝히지 않는 편이 낫겠다. 다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물건을 구입함에 있어서 가치를 반영하고 그 물건을 통해 나의 미래를 상상해 보는 일은 참 기분이 좋다. 물론 내가 훗날 다도명인 될 일은 절대 없다. 그렇지만 우선 나는 그날그날의 기분과 신체리듬에 맞는 차 한잔을 후딱 우려서 호로록 쓰읍 들이 마시면서 자아도취에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무슨 차를 마시고 싶은지 묻고, 좋은 차를 권하고, 그 차를 잘 우려서, 예쁜 잔에 차를 담아 정성껏 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딸내미나 아들내미가 생기면 온 식구가 둘러 앉아 차 한잔의 여유를 담은 담소를 나누고, 차문화에 얽힌 세계역사의 파란만장함을 안주삼아 만담같은 수다파티를 열 수도 있다. ‘이제 잘 시간이야. 잘 자 내사랑’하면서 아이들의 등을 토닥일 수도 있겠지. 그러면 우리는 차 한잔의 따뜻한 온기를 이불삼아 달콤한 잠에 빠지는 것이다!


  인생은 장비빨이라고 외치는 어느 유투버의 말이 생각난다. 그 말이 나는 밉지 않다. 물건을 산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겐 꿈을 꾸는 행위와 같다. 물건을 산다는 건 가치를 사는 일, 나의 미래를 그려보는 일, 현재에 낭만이라는 색을 입히는 붓칠을 하는 일이다. 나는 이런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많은 사람들이 느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우리 먹는것 입는것 조금 아껴서 좋아하는 것들을 좀 더 사기로 합시다. 많이는 말고 조금만요.


지금까지 저의 언박싱 글이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구독과 좋아요는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만나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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