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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롱올립 Mar 13. 2020

보고싶은 오스카와일드씨

  험프리(Humphrey’s)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 넷은 맛있는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네 인물은 남편과 나, 남편의 직장 상사와 그들의 새 거래처 직원이다. 오전 여섯시부터 만난 우리는 독일을 출발하여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오늘 1박을 할 예정이다. 이 세 명의 남자는 어색하다. 그들은 일로 만난 사이에서 절대 넘을 수 없는 관계의 규칙을 철저히 따르는 중이다. 아마도 이들이 지키고 있는 규칙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일 얘기를 할 때에는 감정에 대해 일절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가 피곤하다든지, 상대가 피곤하여 걱정된다는 말은 어쩐지 낯간지러워서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둘째,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한다. 따라서 대화중에 사적인 궁금증이 자연스레 일더라도 그런 호기심은 살짝 덮어두는 것을 권장한다. 셋째, 호텔에 들어가서 쉬기 전까지는 오직 일 얘기만 한다. 일 얘기를 하다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을 때에도, 그래도 무조건 일 얘기만 한다. 나는 이 테이블위로 지금 당장 어떤 조치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오늘 하루 동안 엿들은 내용만으로도 나는 이미 세 남자가 종사하고 있는 비즈니스에 전문가가 된 것 같았다.

  남편은 지금 당장 호텔에 들어가 눕고 싶은 모양이다. 그는 오늘 여섯시간 가량 운전을 하며 우리 일행을 데리고 다니느라 몹시 지친 상태였다. 남편의 기진맥진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그를 보호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옆에 앉은 상사 K는 나머지 세 명과 나이차이가 꽤 나는데 그래서인지 그는 하루종일 조용했다. 그는 실제로 진중한 성격을 가졌을지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K의 침묵이 지금 이 저녁식사 자리에서는 다소 민폐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말을 하지 않고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황적인 맥락에서 볼 때 모두가 지쳐있고 그리 친하지 않은 지금 같은 때에는 허공에 대고 아무말이나 해대는 편이 나을 것이다. 거래처 직원 J는 아까부터 화가 나있다. J는 마리화나 냄새로 머리가 지끈거린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내성적인 성격의 독실한 크리스찬인 그에게 대마초의 향기가 진동하는 암스테르담의 밤거리는 혼돈 그 자체인 듯했다.

  그렇다면 이 세 남자 사이에 앉은 나는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나는 일종의 사명감을 느끼면서 본능적으로 이 저녁 식사 테이블의 주도권을 내가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암울한 식사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넷 중에 ‘나’ 뿐이었다. 왜냐하면 이 세 남자는 서로서로 대화를 하면서도 아무런 관계없는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내가 그들의 대화에 참여해 주기를 필사적으로 원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종일관 나를 끼워 넣어 대화했다. 그들은 “오늘 그 사업장에 그 사람, 정말 나이스하더라. 그치?”라고 말하면서 나를 보고, “네, 부장님. 오늘 출장은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라고 답하면서 나를 보고, “저도 오늘 출장 정말 좋았습니다. 제가 정말 두 분 덕분에 많이 배웠어요.”라고 말하면서도 나만 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밤 내 역할은 이 식탁위에 무겁게 내린 갑갑한 공기를 조금 순환시키는 것이리라. 나는 이들과 아무 이해관계가 없으므로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방식이야 어찌 되었든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밤이었다.

  네덜란드 정부는 중독성이 강한 코카인이나 엑스터시등은 엄격하게 금지하는 대신에 상대적으로 중독성이 약한 마약인 대마초를 합법으로 인정하고 있다. 성매매 합법화와 마찬가지로 컨트롤 가능한 범위 내에서 사람들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네덜란드의 이념이 반영된 정책이다. 시민들은 공식적이고 대중적인 방식으로 대마초를 판매하고 즐길 수 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커피숍’이라고 불리는 마약상점에서 대마를 구입할 수 있고 거리의 평범한 디저트 가게 어디에서나 손쉽게 비흡연자를 위한 대마 브라우니나 대마 사탕도 판매한다. 다운타운의 거리를 걷다보면 담배 냄새보다 더 쉽게 맡을 수 있는 것이 대마 냄새이다. J는 암스테르담 사람들이 대마초를 이렇게나 많이 피워대는 것에 대해서 많이 놀랐다고 했다. 하긴, 나도 오늘 하루동안 적지 않는 양의 대마를 간접 흡입했다. 처음 대마 냄새를 맡았을 때 예고도 없이 코 속으로 훅 들어오는 다량의 꽃가루 냄새같은 것에 무척이나 당황했다. 대마의 냄새를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데 분명한 것은 결코 유쾌한 향은 아니다. 기분 좋은 향은 맡았을 때 “어머, 이거 향 너무 좋다. 무슨 향수지?”라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대마의 냄새는 “읍, 이거, 꽃향기야? 뭐가 이래? 뭐지 이거? 아우, 머리 아파.” 대충 이런 반응이라고 상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나 : 머리는 괜찮으세요? 아니면 호텔에 좀 일찍 들어가서 쉴까요?
J : 아니예요. 지금은 훨씬 나아졌어요. 아까는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아시다시피 전 크리스찬이라서 이런 상황이 좀 혼란스러워요. 뭐랄까, 엄연히 선과 악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는데... 나라에서 이렇게 마약을 허용한다는 게 이해가 안되요.
나 : 저도 진짜 놀랐어요. 특히 아까 길에서 만난 술취한 젊은 애들은 거의 다 대마냄새를 풍기던데요? 암스테르담은 정말 자유로운 도시인것 같아요.
남편 : 대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제가 사실 영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대마를 몇 번 피웠어요. 그 때는 공부하는게 너무 힘들고 사는 것도 빡빡하거든요.
일동 : .....?
남편 : 대마를 처음 피우면 순간적으로 뇌에 산소가 공급되는게 줄어들면서 사람이 환각상태에 빠져요. 그때부터는 다 기분좋게 취한 상태로 술도 마시고 노는 거예요. 특히 금요일날 저녁에 같이 공부하는 애들이랑 기숙사에서 하우스파티를 한 번씩 열어요. 그러면 남자애들은 전부 큰 방에 들어가서 단체로 대마초를 피워요. 지금 이런 얘기를 하면 ‘뭐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들 하겠지만, 대마가 중독성이 약해요. 그리고 워낙 유럽애들이 대마를 많이 피니까 나중에는 그게 그렇게 나쁜 행동이라는 생각이 안 들더라구요.
나 : 얼마나 피운거야? 솔직히 말해봐. 완전 꾼이었지?
남편 : 아니야, 난 그냥 몇 번 피웠어. 애들이 주는 거. 그리고 그때는 학위따느라 공부하는게 벅차서 마냥 놀 시간도 없었거든? 나랑 같이 피우던 애들도 전부 박사공부하는 애들이었어. 그냥 하도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일탈을 잠깐씩 하는 거지, 걱정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어.

  연애시절 남편에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나도 지금 저기 얼빠진 표정으로 앉아 있는 J와 같이 적잖이 놀라고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지금 대마초를 피워댔던 사람이랑 데이트를 하고 있는거야? 오 마이 갓! 왜 이 얘기를 지금 하는 거야? 이 중요한 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저 표정은 또 뭐지? 세상에, 이 남자 정말 간도 크다. 나 어떡해... 망했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좀 더 오랫동안 남편을 봐온 K 는 크게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그가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남편이 평소 쌓아온 대외적인 이미지가 도대체 어떻길래 K가 이리도 태연하단 말인가, 슬그머니 장난기가 발동을 했는데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 접어 두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나 결혼을 하고 지금 나와 한 집에서 같이 사는 이 남자는 대마초를 피워대던 과거의 이력이 주는 부정적인 선입견과 반대로 꽤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유학시절에 무용담처럼 전해 내려오는 몇가지 이야기는 다행히도 우리의 결혼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언젠가 친한 친구와 절교하고 싶다고 얘기했을 때 남편은 그 친구의 입장이 되어 좀 더 넓은 마음으로 그를 이해해주라고 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미워도 그게 서로 얼굴을 안 보고 평생 등지고 살만큼 심각한 문제인지 잘 생각해 보라는 요지였다. 어쩔때에는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편을 좀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제아무리 와이프라도 마냥 오냐오냐하는 것이 인간사에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타입이다. 남편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기준은 ‘상황적 맥락’안에서 이해가능한지 아닌지에 따른다. 나는 선이 악이 될 수도 있고, 악이 선이 될 수도 있는 가변적인 가능성을 늘 열어두는 그의 유연한 사고를 존중한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세상사에 이해못할 일도 없고 용서 못 할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심판자로 나서서 이건 되고 저건 안 된다고 무 자르듯 얘기할 수 있겠나, 그럴수는 없겠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 함부로 세상을 판단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좀 더 겸허해지고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다.

  남편이 대마초 흡연담을 화두로 던진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 보였다. 그는 삶을 대하는 유연성에 관하여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 이렇게 평범하게 앉아있는 박대리라는 사람도 대마초를 피워봤고요, 그게 몸에 안 좋은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이해못할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라고 말이다. 우선 나는 그의 고백으로 적잖이 당황하고 있는 상사 K와 거래처 직원 J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나 : 저는 왜인지 모르게 암스테르담이 좋아요. 독일에만 있다가 여기 오니까 뭔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요. 특히 저는 여러분들이 일할 때 거의 혼자 지내니까 좀 외롭기도하고 위축되기도 하더라고요. 지금은 어쨌든 아주 좋아요. 확실히 독일보다는 암스테르담이 제 스타일이예요.

K : 독일이 좀 그렇죠. 독일은 정말 좋아하거나 정말 싫어하거나 둘 중에 하나의 반응인 것 같아요. 아마도 지예씨는 후자인 듯 하네요. 보통 혼자 여행오시는 여자분들이 독일에서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은 저도 들었어요.
나 : 네, 맞아요.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 사실 독일에서 인종차별을 몇 번 당했거든요. 제가 확실히 느끼는 건요, 제가 남편이랑 같이 있을 때랑 혼자 있을 때랑 사람들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르다는 거예요.
J :  아 정말요? 저는 그런 건 못 느꼈는데요.
나 : 여러분은 남자니까요. 제가 경험한 유럽은 아시안 여성에 대한 인식이 잘못된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일전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다 여행을 해봐도 확실히 아시안 여성이 혼자 있으면 인종차별적인 언행을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독일도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남자랑 같이 있으면 대우가 좀 달라요. 함부로 대하지 않고 뭐랄까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남편 : 실은 와이프가 이번 여행을 마지막으로 독일은 다신 안 올 거라고 했답니다. 유럽여행을 당분간 안 하고 싶다더라구요. 저는 남자로서 일정부분 이해가 되요. 동양 여자을 향한 서양 남자들의 시선이 말이예요. 여자로서 감당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나 : 늘 몇몇 사람들이 문제죠. 저는 평균적인 국민들의 의식수준을 얘기하고 싶어요. 말로 하기는 좀 미묘한 그 나라만의 분위기나 사람들의 온도같은거 말이예요.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거요. 사람들이 어쩐지 쌀쌀맞다거나, 생각이 보수적이라거나, 변화에 둔감하다거나 하는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무드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런데 독일은 아니었던 거죠. 차갑고 직선적이고 겉으로는 아닌척 해도 실은 좀 배타적인 사람들이다, 그런걸 느꼈어요.
J : 그렇군요, 그런데 대마초 말이에요, 그걸 허용하는 의도가 뭘까요? 여기 예술인들의 도시 암스테르담이 여러가지 면에서 많이 자유롭다는 것은 익히 들었어요. 그런데 이 정도일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대마초는 어찌되었든 마약류인데 그게 몸에 좋을리도 없고, 사회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리도 없다고 생각해요. 허용하는 이유가 뭔지를 모르겠네요.
남편 : 여러분, 그런데 대마초가 정말 나쁜 걸까요? 한번 잘 생각해 봐야 해요. 술, 담배 모두 건강에 해롭고 나빠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왜 금지하지 않는 거죠? 물론 술과 일반적인 담배는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하진 않아요. 그런데 사실 좋다, 안 좋다 두 가지의 기준에서 분류해야 한다면 ‘안 좋은 것’에 속하잖아요.
나 : 그럼 오빠는 대마초를 허용하는 것에 찬성하는 거야?
남편 : 아니, 그런 말은 아니야. 다만 대마가 나쁜 것인기, 대마를 무턱대고 많이 피워대서 사회적으로 어떤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의 행동이 잘못된 것인가를 잘 따져 봐야 한다는 거야. 술을 많이 마시면 건강에 당연히 해롭고, 담배도 마찬가지야. 그건 술이나 담배라는 물화 자체에 있는 속성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그걸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제라는 거지.
K : 그럴듯 하네. 그럼 여기 사람들은 성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책임을 묻는 범위안에서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건가?
나 : 담배 살 때 이건 건강에 안 좋다는 경고문을 띄우잖아요. 그래도 궃이 본인이 사겠다면 그건 그 사람의 자유의지니까 정부가 달리 막을 권리는 없는 거죠.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어요.
J :  그래도 전 어쩐지 이 부분에 있어서는 동의를 할 수가 없네요, 마약이랑 술, 담배를 같이 비교하는 건 억측인 것 같기도 하고요.
나 : 흠, 저는 암스테르담의 이런 패기가 좋아요. 훨씬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워요. 동양문화는 뭔가 안 좋을 것 같다고 예상되는 것들은 무조건 금기시하잖아요. 이건 하면 안 된다, 저건 하면 안 된다 여러가지 룰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예상되는 울타리안에 안전하게 몰아넣어요. 물론 거기에는 당위성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궃이 처음부터 모든 걸 금지하는게 과연 좋은것인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K :  정부가 국민 개개인에게 가지는 신뢰도에 따라 이렇게 큰 정책의 차이가 벌어진다고 생각해요. 국민을 신뢰하는 정부는 국민에게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반대의 경우에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세부적인 규범들을 더 만들어 버리는거죠.
나 : 오우, 그럴듯하네요! 실제로 암스테르담 시민들이 대마초 흡연으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요. 한 번에 구입할 수 있는 대마의 양이 제한되어 있어요. 소량이죠. 오히려 저희처럼 외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대마를 무분별하게 피워대서 여러가지 시비가 붙는대요. 그래서 암스테르담시에서는 외국인에게 대마의 구입과 복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최근기사에서 읽은 것 같아요.

남편 : 시민들에게 스스로 선과 악을 판별할 기회와 책임을 심어주는게 진보적이고 멋지네요. 일단 시민들에게 무엇이든 시험해 볼 기회를 주고 문제가 발생하면 시민의 합의해 의해 때에 맞는 합의책을 논의하는 방식이요. 우리가 늘 지금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거라는 믿음, 혹은 우리는 어떤 문제이든 합리적인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는 걸까요?

K :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튼 지예씨는 암스테르담에 푹 빠지신것 같은데요?
나 : 네, 정말 그래요. 아까 저희가 호텔에 체크인할 때 그 직원분들 정말 친절하지 않았나요?  
J : 그건 그래요, 저도 제 방 입구까지 저를 에스코트 해주시더라고요. 사람들 표정도 밝고 늘 웃는 인상같아서 마음이 편했어요. 사람들이 독립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느껴졌어요.
나 : 저는 그래서 마리화나 냄새가 좀 나더라도 독일보다는 암스테르담을 다시 오고 싶네요. 흥청거리고 정돈이 안 된 이미지이지만 여기서는 제가 여러모로 눈치를 좀 덜 보면서 다닐 것 같거든요.

  치얼스! 마지막까지 남은 한 모금의 와인과 맥주를 비워내고 식당문을 나왔더니 암스테르담의 밤하늘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한낮에 타운을 가득히 점령했던 자전거의 행렬도 자취를 감추고 거리는 조용한 밤의 정적속으로 잠기는 중이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 흥건히 술에 취한 젊은이들의 무리와 아쉬운 발걸음에 닫힌 가게문을 기웃거리는 관광객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올드타운에 위치한 식당에서 숙소가 있는 주택가까지는 걸어서 십분정도의 거리였다. 한껏 친해진 K와 J는 앞장 서서 어깨를 나란히하고 걸었다. 삼촌과 조카뻘 되는 두 사람이 한결 서로가 편안해진 모양으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발을 맞추며 걸어갔다. 그 모습이 사뭇 예쁘고 정겨워서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비를 피하려고 외투에 딸린 후드모자를 집어 쓰려는 찰나, 하얀 네온 사인으로 빛을 발하는 전광판의 글귀가 보였다. 남편과 내가 잠깐 발길을 멈춘 어느 호텔 앞 광장이었다. "뭐라고?" 중얼거리듯 웅얼거리던 나는 남편의 물음에 무심한 듯 대답했다. "아니야, 그냥 개소리야." "뭐야, 얘기해봐." "진짜 별거아냐. 오빠, 근데 난 암스테르담이 진짜 좋아!" "그래 알겠어. 얼른 가자. 늦겠다." 우리는 앞서가던 K와 J를 따라잡으려 빗속을 내달렸다. 후두둑 빗방울 소리가 모자에 부딪히면서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청량했다. 이 싱그러운 밤공기와 달짝지근한 마리화나 냄새, 오래된 물건들이 가지런히 진열된 화점들, 반사된 가로등 불빛이 물결에 흔들거리는 모습들이 흡사 몽환적인 영화의 한 장면같았다. 오늘은 두 발 뻗고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홍등가 컨셉의 샛노란 조명등과 야하게 포즈를 취한 여성들의 누드화가 반기는 숙소이지만, 아무렴 어떠랴! 나는 자꾸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아까 광장에서 보았던 글귀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아일랜드의 위대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이었다.


 Life imitates art far more than Art imitates life.  

예술이 삶을 모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삶은 예술을 모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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