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대답을 하긴 했는데, 뭐지 이 이상한 기분은? 생각해보니 아드님께 해야 하는 말을 나한테 잘 못 하신 것 같았다. 우리 엄마가 내 스타킹 세탁기에 넣으면 안 되니 손빨래하라고 사위한테 당부하면 좀 이상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그냥 '아, 우리 남편이 자기 와이셔츠 스스로 못 다려 입는구나' 정도로 접수했다. 그가 못 다리기 때문에(다릴 시간도 없을 것 같다) 세탁소에 잘 맡기고 있다. 어머님도 더 이상 나에게 다리라는 말씀은 안 하시지만 세탁비를 아까워하시긴 한다.
이상한 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요리에 무관심하고 칼을 두려워하는 나와, 결혼하기 전부터 맛있는 것 많이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한 남편이 만나니 주방은 자연스럽게 그의 차지가 되었다. 물론 매일 삼시세끼 요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주중엔 아예 외식만 할 때도 있고, 많아봤자 하루 이틀 정도만 저녁을 집에서 먹으니 대부분 주말에 요리를 한다. 주말에도 기분에 따라 밖에서 먹거나 시켜 먹을 때도 있고.
그런데 우리 엄마는 사위가 요리를 한다는 사실을 좋아한다기 보단 계속 '너는 남편이 해주는 음식 먹기만 하면 되는 거냐'라고 타박 아닌 타박을 한다. 요리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주실 때 남편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듣고 내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 '쟤는 관심도 없다'며 놀리시고, 가끔 밑반찬을 싸주시면서도 '우리 딸이 요리를 안 하니까 이런 거라도 싸줘야지'라는 말을 덧붙이신다. 이때 좀 억울하다, 마치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남편이 대신해주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물론 요리는 힘들다. 재료 손질부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음식물쓰레기 정리, 그리고 요리하며 어질러놓은 그릇 설거지의 대부분은 남편이 한다. 당연히 너무 고맙고 요리를 해줄 때마다 기대된다(소질이 있어서 맛있다).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하면 다들 부러워해서 나도 흐뭇하다. 그런데 티가 안 나서 그렇지 요리를 안 하는 나도 공짜밥을 얻어먹고 있진 않다. 남편이 요리할 때 나도 매우 분주하다. 어찌 집안일에 주방일만 있겠는가?
1. 빨래 세탁
빨래는 세탁기가 알아서 한다? 물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화장실 옆 하나의 산이 되어있는 빨래 더미를 일반 속옷, 예민한 속옷, 수건, 일반 겉옷, 예민한 겉옷으로 구별하여 세탁실로 들고 가서 다 분류해서 모드를 달리하여 돌려야 하는 것도 일이다(더불어 엄마가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빨래를 왜 싫어했는지이제야 이해가 간다...). 빨래가 좀 밀려 있는 주말엔 세탁기만 하루 종일 돌리는 것 같다. 방치해 두면 다시 헹궈야 하니 늦지 않게 옷 종류에 따라 건조기에 넣거나, 그냥 널어서 말리거나, 스타일러 건조 기능을 사용한다(건조기 없었으면 이걸 언제 다 널었을까 싶다). 건조기와 스타일러 먼지도 때마다 버려준다. 내가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오지 않으면 빨래는 며칠이 지나도록 건조기 안에 방치되어있다.
2. 손세탁
스타킹처럼 세탁기에 넣으면 상하기 때문에 손으로 빨아야만 하는 옷들이 있다. 허리가 정말 아프다..
3. 청소기, 물걸레
결혼 전 로봇청소기를 위해 남편과 엄청 실랑이를 벌였었다. 남편은 일반 청소기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입장이었고, 나는 그럼 오빠가 일반 청소기로 청소 다 해줄 거냐며 다퉜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싸워서 로봇청소기를 얻어내길 참 잘했다, 청소기는 내 담당이니 말이다.
로봇청소기를 돌리기 위해서는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베란다 문과 화장실 문을 닫고, 바닥에 있는 장애물을 치우고, 방문은 활짝 열고, 의자 위치를 바꿔주며, 우리 집의 경우 리클라이너 소파의 다리 부분을 청소기가 밑으로 지나갈 수 있도록 올려줘야 한다. 청소가 끝나고 원위치시켜야 하는 것들도 있다. 이렇게 로봇이 한번 청소해주면 나는 문 뒤쪽에 있는 먼지만 무선청소기로 빨아들이고 먼지통을 비워주면 된다.
물걸레가 수동 탈부착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한 번 청소기를 돌리고 먼지를 빨아들인 후, 물걸레를 부착하여 다시 청소기를 작동시킨다. 걸레 물이 마르기 때문에 3개의 물걸레를 15분 간격으로 교체해 줘야 한다. 그리고 다음 사용할 때를 위해 물걸레를 빨아놓아야 한다.
4. 먼지 청소
가끔은 마른걸레로 집안 가구들에 쌓여있는 먼지를 구석구석 닦아줘야 한다.
5. 베개커버, 이불 깔개, 이불, 매트리스 커버
주기적으로 챙겨서 세탁하고 갈아줘야 하는데 종목마다 주기가 다 다르다. 말린 후 걷어와서 스타일러에 넣어서 살균하는 것은 필수이다. 침구용 롤러도 선물 받아 가끔씩 쓱싹쓱싹 먼지를 제거한다. 이불도 건조기에 넣어서 주기적으로 털어준다.
6. 화분 물 주기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이것도 까먹으면 정말 큰 일이다..
7. 화장실 머리카락 청소
화장실 머리카락은 내 지분이 대부분이니 내가 치운다.
8. 생필품 주문
물, 세제, 쌀, 샴푸 등의 필수품이 떨어지기 전에 주문해놓아야 한다. 배송비가 나오지 않도록 금액을 잘 맞춰서.
9. 밥
쌀을 씻어서 안치는 일은 거의 항상 내가 한다.
10. 재정관리
통장관리도 내 몫이다. 월급이 입금되면 카드값, 관리비 등을 집계하여 적절한 금액을 통장마다 배분해놓아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남편이 와이셔츠를 세탁소에 맡기는 것은 그냥 본인이 옷을 다릴 시간이 없기 때문이고, 요리를 하는 것은 그냥 우리의 가사분담이 그렇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자'인 내가 안 해서가 아니다.지금까지 집안일의 총책임자는 디폴트가 여자이고 남편의 일은 쓰레기 버리고 옆에서 거드는 수준이었는진 잘 모르겠지만, 똑같이 바쁜 맞벌이 부부에게 그런 인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뒷정리는 귀찮겠지만 그나마 우리 남편은 요리를 하며 즐거워하고, 유튜브로 다양한 메뉴를 찾아보고, 얼마 전 본인 전용 칼도 샀다(그거로 해야 야채가 더 잘 썰린다나). 언젠간 본인만의 주방을 갖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그런데 솔직히 내가 하는 일의 전부는 간단해 보이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어디다 티 낼 수도 없는 집안일뿐이다.
그러니 나는 내 밥값은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당연히 내가 해야 되는 일을 안 해서 남편한테 시키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가사 분담에서 빨래, 청소, 기타 등등을 맡고 있는 맞벌이 직장인일 뿐이다.그 사람이안 하는 것에만 집중하면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놓치기 쉽다.남자에게 이런 눈치를 줄 사람은 와이프밖에 없겠지만, 누군가가 남편에게 왜 자발적으로 세탁기와 청소기를 돌리지 않고 이불관리를 하지 않냐고 채근한다면 그도 억울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