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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추꽃 Jan 02. 2022

<타인의 친절>을 읽고

<타인의 친절>이란 책은 사실 조금 실망스러웠다. 우선 읽는 것이 조금 어려웠는데, 그도 그럴 것이 앞부분에는 진화론에 관한 과학적인 이야기, 중간에는 역사적인 전개, 그리고 가면 갈수록 철학자들도 등장하며 살짝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나와서 정확히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는 느낌이랄까? 개인적으로는 앞에 있는 진화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재미있었는데 뒤의 내용과 크게 연결되는 느낌은 안 들고 뚝 끊기는 느낌이라 아쉬웠다. 그리고 책 앞부분에서는 우리가 왜 타인을 도와줄까라는 지극히 개인의 행동에 초점을 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개개인이라기보다는 결국엔 가난과 각종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국가의 역할에 더 집중하고 있는 책인듯하고, 나중에는 국제무역과 환경문제까지 나오는데 하나의 책에 너무 큰 욕심을 낸 것이 아닌가 싶다(이 책을 이렇게밖에 해석 못한 나의 능력 부족일 수도 있다...).


개인에서 국가의 역할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부분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있긴 하다.


"축의 시대 사람들이 곤경에 처한 가난한 사람이 필요로 하는 걸 충족시켜주기 위해 황금률 추론을 토대로 다양한 사회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양한 자선 제도 덕분에 황금률대로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은 낯선 이를 만날 때마다 이런저런 추론을 하며 심적 갈등을 겪어야 하는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들 대신 황금률을 이행하는 일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 제도를 지원하기만 하면 됐던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가' 왜 타인을 도와줄까 가 아니라 '국가가' 왜 복지정책을 펼칠까에 대한 내용으로 바뀌는 느낌이라 아쉽다.  


그래도 흥미로웠던 부분을 짚고 넘어가 보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진화론에서부터 시작되는데 타인을 도와주는 행위는 그 사람을 불리하게 만들기 때문에(한정된 자원을 나눠주는 행위니까) 진화론적으로 보았을 때 없어졌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우리는 타인을 도와주는가에 대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는 순수하게 이타적인 면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이타적인 것도 결국에는 우리도 훗날 도움을 받고 싶거나 하는 등의 이기적인 이유로 인해 발현되는가의 문제인데, 여러 이론이 있지만 결국에는 순수하게 이타적인 것보다는 어떠한 이기적인 이유로 남을 돕는다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흥미롭게도 낯선 이의 입장에서 서보는 것이 인간의 공감 능력을 발휘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내 입장에서 생각해봐!'라는 말이 크게 효과가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시뮬레이션하는 뇌 부위가 곤궁에 처한 낯선 이들에 의해서는 거의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라고 한다. 심지어 "사람들은 원래 낯선 이에게 공감을 느낄 기회를 적극적으로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인데, 그러지 않을 경우 별 관심도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는 번거로운 일에 빠지게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리가 진심으로 공감하면서 도움을 주는 대상은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 가족이다(우리와 관련이 있는 대상들... 즉 이것도 자기중심적인 측면에서 파생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남을 돕는 성향도 결국엔 이것의 확대에 불과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는 아직도 남을 돕는 것에 있어서는 이기적이라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이 겪는 고통에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생각보다 굉장히 생물학적으로 이기적이다.


아주 직관적인 예시가 있는데 우리는 먼 국가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사망자 수가 어마어마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잠깐 슬퍼하다가 꿀잠을 자겠지만, 우리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잃게 된다면 그 상실감으로 인해 계속 이에 대해 걱정하고 잠 못 이룰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다른 곳에서 일어난 지진은 우리의 새끼손가락만도 못하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왜 남을 도울까? 책은 그 이유가 시대적으로 변해왔다고 보고 있는데 이는 국가와 통치자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빈곤 문제를 다루는지에 대한 내용에 더 적합한 것 같고, 인간 개개인 자체는 예나 지금이나 이기적인 이유에서 남을 돕는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적으로 변해왔다고 하는 그 이유들이 아직도 유효한 것 같다. 나랑 친한 사람이라서. 나중에 나도 언젠가는 도움받기 위해. 어떤 이유에서건 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영혼의 구원을 위해. 명예를 위해. 결국엔 집단에서 추방되지 않기 위해서고, 다 나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닐까? 


그래도 우리가 예전보다 더 넓게 마음을 쓸 수 있는 이유는 세계화로 인해 지식의 폭도 넓어졌으며 세계사 등에 대해 배우며 어쨌든 '지구공동체'라는 인식도 가지고 있고, 뉴스도 실시간으로 전달되게 때문에 머나먼 국가들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 우리의 관심사 안에 포함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사회정책들을 지지하고 가난한 이를 돕는 정책들에 관심을 갖는 것도 결국에는 이제는 이것들을 남의 문제라기보다 언젠가 내 문제, 내 부모님의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도 큰 것 같다. 남들과 연결된 시대에 살며 우리는 절대적인 빈곤선 위에 있더라도 남들과 비교했을 때 느끼는 '상대적 빈곤'도 많이 느끼는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실제로도 부의 불평등은 굉장히 심각하며 우리 모두 이를 알고 해결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권리의식이 향상되면 잘 사는 것은 우리의 권리라고 느끼고 있으니까. 그러니 예전보다 가난과 각종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더 많이 가지는데 이것이 꼭 '타인'에 대한 친절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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