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여줄 남자.

20화. 시간의 정원

by 묭롶

2027년 8월 장마가 물러간 뒤 시작된 무더위로 대한민국은 연일 펄펄 끓어올랐다.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일고 잠시만 바깥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땀범벅이 될 정도로 뜨거운 날들이었다. 이렇게 바깥은 열화지옥처럼 뜨거웠지만 서울 강남 한 복판에 들어선 투명한 돔으로 둘러싸인 오를리 복합 쇼핑몰 중앙에 위치한 시간의 공원에는 흰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돔 유리를 경계로 한쪽은 열화지옥이 한쪽은 여름 속의 겨울이 펼쳐졌다.


2023년 병세가 설계한 시간의 정원은 2026년 완공과 동시에 각종 건축 디자인 상을 석권했고 오를리 복합쇼핑몰은 오픈과 동시에 해외 관광객들의 필수 관람 코스가 되었다. 한 여름에 펼쳐지는 겨울과 한 겨울에 미리 즐기는 봄을 테마로 하는 시간의 정원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정작 이 공원을 설계한 병세는 자신이 어디에서 영감을 얻어 이러한 결과물을 얻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분명 그 자신 스스로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울특별시가 주관하는 북촌 한옥 마을 리뉴얼과 관련된 현장조사를 위해 오전부터 한옥마을을 답사하던 병세는 어느 골목 끝집 앞에서 걸음을 멈칫했다. 분명 어딘가에서 본 것만 같은 풍경이지 싶어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던 그가 생수를 사기 위해 들른 슈퍼마켓에서 주인아저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자꾸 쳐다보았다. 어딘지 모를 기시감에 휩싸인 그는 점심도 먹고 더위도 식힐 겸 자신이 설계한 시간의 정원에 들렀다.


쇼핑몰에서 간단하게 냉면으로 점심을 해결한 그는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손에 들고 공원벤치에 앉아 눈발이 흩날리는 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늘하늘 내려오던 눈 한송이가 그의 안경 위에 붙어 금세 눈물처럼 녹아내렸다.




2023년 12월에 들어서자 미리내의 몸은 발끝부터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하지만 않았다면 병세를 몇 번은 더 찾아갔을 텐데 이제 기회조차 없어진 것 같아 그녀는 절망감이 들었다. 자신의 지금 처지가 왕자님에게 다가가기 위해 다리를 얻은 대신 물거품으로 사라질 인어공주와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녀는 병세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그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병세가 그녀의 가르침 대로 본인 스스로의 의지대로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편을 택했다면 그의 결정을 존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더는 소주를 사러 갈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다면 그녀는 남은 시간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내고 싶었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자신의 발목을 바라보며 그녀는 자신이 지금 무얼 하고 싶은지를 생각해 보았다. 외출이 불가능한 지금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고민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병세와 함께 했던 짧은

시간들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했던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건 아닐지도 몰라. 짧은 순간일지라도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하겠지.

에라 모르겠다. 긴 바지로 발목이 가려지는 지금이라도 나가서 소주나 몽땅 사다 놓자.

언제 팔목하고 입 없어져서 못 마실지 모르는데.....'





그녀가 그렇게 마지막으로 사서 쟁여놓은 소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던 12월의 중순 경 갑자기 창밖으로 내리는 첫눈을 바라보다 오후 반차를 쓰고 회사를 뛰쳐나온 병세는 그 길로 국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만약 그녀의 말이 다 사실이라면 기록이 남았을 거야.'


국립 도서관에 도착한 그는 그녀가 가토를 암살했던 1938년 10월 25일 다음날인 10월 26일 신문기사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기사를 읽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무국장 피습 살해 사건'과 관련된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큰 헤드라인 기사 아래 동그라미 안에 실린 피살자 가토 경무국장의 사진을 본 병세는 순간 헉 소리를 냈다. 사진 속 인물은 분위기와 복색은 달랐지만 분명 자신이었다. 놀라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택시를 잡아타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광주광역시로 버스표를 끊은 그가 지리산 화엄사에 도착한 시각은 이미 해가 저문 뒤였다.


막상 화엄사까지 찾아갔지만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그가 대웅전 앞에 서성거리고 있을 때 스님 한 분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시주님, 해도 저문 시각에 무슨 일이신지요."


-"네.. 스님. 제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이곳에 오래 계신 스님이 계신지요."


"그렇다면 주지 스님께 여쭈셔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저녁 예불 시간이 되었으니

기다려주시면 소승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를 향해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 스님이 저녁 예불을 위해 대웅전 안으로 사라진 뒤 병세는 화엄사 내부를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그녀가 자명스님과 별을 보았다는 넓적한 바위와 그녀를 돌봐준 공양주 보살들이 지냈다는 요사채 그리고 그녀가 무예를 닦았다는 곳들을 둘러본 그의 눈에 그곳에 있었던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조국의 독립을 향한 간절함으로 삶을 불태웠던 그녀가 그 대가로 이제 환생도 하지 못한 채

소멸된다고 생각하니 그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저녁 예불이 끝나고 스님들이 빠져나간 대웅전 내부에서 앞서 스님에게 말을 전해 들은 주지스님이 나와 그를 맞이했다. 1919년에 태어나 1938년에 죽은 미리내에 대해 묻는 그를 주지스님은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잡고 대웅전 안으로 이끌었다. 그곳의 한쪽 벽면은 절에 극락왕생을 부탁한 시주들의 위패로 가득했다. 주지스님은 그 위패 중 한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위패들 가운데 축원글이 적힌 그림이 한 장 걸려 있었다. 자명스님이 미리내가 죽은 뒤 그림으로 그려놓은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죽었지만 죽지 못하고 존재하는 미리내는 산자들의 기억에 존재하지 못한 채 죽은

자들의 마음속에 안타까움으로 자리하다 사그라들었다.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하는 삶과 그 끝에 소멸이라니...

나까지 그녀를 이리 보낼 수는 없어.


그녀가 독립군의 임무를 자명스님으로부터 전달받았던 그 넓적 바위 위에서 밤하늘 가득히 펼쳐진 은하수를 올려다보던 병세는 그날밤 그녀와 약속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마음을 굳힌 그는 아침 일찍 서둘러 다시 서울로 향했다. 구례에서 다시 광주광역시를 거쳐 그가 북촌 한옥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진 뒤였다. 그는 그가 미리내에게 이끌려 북촌에 와서 소주 공병을 팔았던 슈퍼마켓에 들러 부식거리와 소주를 샀다. 장을 본 비닐봉지를 들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그의 눈에 부엌 식탁 옆에 떠 있는 미리내가 보였다. 이미 신체의 삼분의 이 정도가 흩어져 소주잔을 들 손목도 보이지 않는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를 보고 웃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거야.'


자신이 조금 더 일찍 서둘렀다면 아니 애초에 떠나지 않고 곁을 지켰더라면 더 나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자

그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화가 치밀었다.


'어쩌면 지금 저 모습이라면 그녀를 위해서라도 보내주는 게 맞을 거야.'


그의 마음이 그의 몸보다 먼저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소주잔 옆에 놓여있던 그녀의 단도를 집어 들고 이미 투명해져 버린 가슴의 심장으로 추측되는 부분에 내리꽂았다. 그 순간 빛이 폭발했다. 순간 시력을 잃은 병세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환생전에 누워있던 미리내가 눈을 뜬 순간 삼신이 말했다.


"아가야..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다시 보니 반갑구나."


삼신의 목소리를 들은 미리내는 말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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