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여줄 남자.

19화. 지킬 수 없는 약속.

by 묭롶

강남 3 구역 재개발 부지에 들어설 복합 쇼핑몰의 설계도를 3D 캐드로 시뮬레이션하던 병세는 장시간 집중해서 모니터를 본 탓에 눈이 시큰거렸다. 커피도 마실 겸 자리에서 일어서던 그의 눈에 창 밖으로 떨어지는 희끄무레한 물체가 보였다. 무엇일까 싶어 눈을 비빈 그가 창가로 다가섰다.


한 송이, 그리고 또 한 송이 하늘에서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올 겨울 들어 첫눈이었다.

멍하게 흩날리기 시작한 눈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눈처럼 시리고 아름답고 눈처럼 흰 그녀가 떠올랐다. 너무 많은 것을 그녀로부터 받았기에 그는 너무나 자주 그녀가 떠올랐지만 그녀에게 연락할 수도 만날 수도 없었다. 자신이 그녀가 원하는 걸 해줄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아는 자신이기에 그는 그녀에게 비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녀를 떠나온 후 그녀는 단 한 번 회사로 그를 찾아왔었다.






1층 로비의 보안팀에서 인터폰으로 손님이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간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그녀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그녀를 확인한 순간 그는 다시 뒤돌아서서 사무실로 도망치려 했지만 그런 그의 팔목을 그녀가 붙들었다.


"병세야."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음성이 너무나 반가운 그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눈을 깜빡여야 했다.


-"여기 오면 안돼요."


"퇴근하고 집에 가서 얘기하면 안 될까?"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 직원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느낀 그가 서둘러 그녀에게 말했다.


-"저는 더 할 얘기가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요."


"그럼 우리 약속은? 그건 어떡할 건데."


-"미안해요."


그의 팔목을 붙든 그녀를 애써 뿌리친 그는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았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차라리 그녀가 욕이라도 했다면 이리 마음이 아프진 않았을 텐데 그는 못난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1층의 상황을 금세 전달받은 동료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살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는 아이돌급 여신도 거절하는 병세라는 소문이 돌았다.

미리내의 도움으로 복수에 성공했고 원하는 팀으로 전출 받았으며 그녀가 장착해 준 명품 아이템과 노래실력 덕분에 회사에서 인기남으로 거듭나게 된 그는 거기에 더해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의 이미지까지 더하게 된 것이었다.


매 순간이 지옥 같았던 병세의 삶은 그녀로 인해 살만해졌지만 그는 평온해진 자신의 현재를 직시하는 순간마다 그녀에 대한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회사 동료들과의 약속과 회식이 많아져 이제 밥을 해 먹을 기회도 많이 줄었지만 어쩌다 약속 없는 주말에 밥을 해 먹을 때면 그의 음식을 좋아했던 그녀가 떠올라 그녀는 어찌 지내는지 소주만 몽땅 마시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지켜보는 병세의 머릿속으로 그녀와 보냈던 지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가며 그녀와의

마지막 날 밤 그녀가 했던 말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잘 들어봐.

난 삼일만세 운동이 있었던 1919년에 태어났어.

만세운동 때 내 부모님은 일제에 의해 돌아가셨고

난 삼칠일도 되지 않아 지리산 화엄사에 맡겨졌어.

그곳에서 나는 자명스님을 스승으로 삼아 독립군으로 길러졌지.

내 임무는 일본군 경무국장인 가토 암살이었어.

나는 1938년 10월 25일 가토와 나를 동시에 찔렀고 둘 다 죽었지.


바로 너의 전생이 가토야.

난 나 자신을 스스로 죽였기에 원래는 환생할 수 없지만

내가 죽인 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 환생하는 조건으로

가토의 환생인 너를 찾아 이곳에 온 거야.

약속된 기한은 일 년, 올해 12월 31일까지 네가 날 죽여주지 않으면 난 소멸돼."


담담하지만 슬픈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눈을 차마 마주칠 수 없어서 시선을 피한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하지만 내가 어떻게.'


그런 그의 표정을 보는 미리내가 말했다.


"알아. 쉬운 일이 아니지. 강요하지 않을게.

지금까지 나는 고민해 본 적이 없었어.

뭐든 그냥 부딪히면 그만이었지.

하지만 이건 내가 뭘 해서 되는 일이 아니야.

내겐 이제 스승도 동료도 아무도 없어.

그간 너에 대한 일들은 검색으로 방법을 찾을 수가 있었는데

이건 아무리 찾아도 답이 없네.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 줘.

네가 가장 간절했던 순간을 떠올려봐.

바로 지금 내가 그래."





'바로 지 금 내 가 그 래.'라는 그녀의 음성이 한 글자씩 그의 가슴에 찍히는 낙인처럼 뜨겁게 박혔다.

그가 그녀에게 느끼는 죄책감의 실체는 그가 비참하게 죽어가던 순간 가장 간절히 바랐던 구원을 주었던 그녀에게 그가 답하지 못하는 약속이었다.


'그녀를 애초에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난 이미 이 세상에 없겠지.....

그녀가 지금 느끼는 좌절감과 공포가 내가 느꼈던 것과 같다는 걸 아는데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심란한 그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거리의 행인들은 내리는 눈을 반가워했다.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그는 매사에 거침없던 그녀가 떠올랐다. 순간 그는 팀장에게 다가가 오후 반차를 신청하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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