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세는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도를 두 손으로 꼭 부여잡고 간곡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그녀의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지만 그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일으켜 몸을 세운 병세는 그녀로부터 뒤돌아서서 방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미안해요. 전 당신을 도울 수 없어요."
그의 말 한마디가 스스로 가슴에 찔러 넣은 일본도 보다 더 가슴 시리게 그녀의 가슴에 박혔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결정이 낙하하는 동안 서로 모여서 한 송이의 눈을 만드는 것처럼 응어리가 된 고통이 그녀의 눈동자에 눈물로 맺혔다.
병세는 그다음 날 짐을 싸서 북촌 한옥을 빠져나왔다.
집을 나온 그는 미리내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녀가 선물한 에메랄드 정장 두 벌을 당근마켓에 팔아야 했다.
정장은 당근에 올리기가 무섭게 서로 웃돈을 주고 사가겠다고 난리가 났다. 한정판으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된 정장 두 벌은 미리내가 사줬던 금액보다 비싼 가격에 팔렸다. 그는 이 돈으로 회사 앞에 있는 원룸 월세 보증금을 구할 수 있었다. 구매자에게 정장을 넘기면서 병세는 이 옷을 사줬던 날에 미리내가 했던 말과 그녀의 표정이 떠올라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며 강해져야 한다고 눈에 힘을 주며 말했던 그녀를 떠올리며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드디어 더원건설로의 복직날 아침이 밝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브랜드 에메랄드로 착장 한 병세는 전신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어딘가에서 미리내가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아서
그는 텅 빈 원룸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지만 그녀는 없었다. 다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의지를 다진 병세가 주먹을 움켜쥐고는 서류가방을 챙겨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가 새로 얻은 원룸에서 회사 까지는 도보로 오분 거리였다. 회사 정문을 들어서기 전 그는 심호흡을 한 후 열린 문을 통과해 보안카드를 찍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아침 출근 시간이라 번잡한 더원건설 1층 로비에 병세가 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어머.. 도대체 누구야? 저런 사람이 우리 회사에 있었어?"
"뭐야... 뭐야.. 저거 진짜야?"
"에메랄드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발랐네. 도대체 저게 다 얼마야."
병세가 엘리베이터에 탄 순간 혼잡한 엘리베이터에 그를 중심으로 공간이 생겼다. 최고급 외산차와의 접촉사고를 피하는 차량들처럼 직원들은 병세의 명품에 혹시라도 스치기라도 할까 봐 스스로 조심했다. 말은 못 꺼내지만 눈길이 분주한 그들이 병세를 위아래를 스캔하는 동안 엘리베이터의 도착음이 울렸고 병세는 곧바로 내려서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휴직하는 동안 비어있던 자리에 그가 앉는 순간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참.. 뻔뻔하기도 하지. 사전에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휴직해 놓고 어딜 기어들어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병세가 없는 동안 구조안전기술팀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핵심업무를 병세에게 몰아놓고 업무에 태만했던 직원들은 병세의 빈자리를 채우기에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직원의 단기 휴직은 인원 충원 사유에도 해당되지 않아서 주어진 업무는 모두 해당팀 내에서 해결해야 했다.
팀장에게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병세가 복직을 하지 않고 그만둬서 새로운 인원을 충원받거나 남은 하나는 만만한 병세가 복직을 하면 다시 편하게 부리는 방법이었다. 옆 부서 팀장이 새로 받은 팀원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것을 지켜본 팀장은 두 번째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이번에 병세가 돌아온다면 초장부터 기를 확 꺾어놓아서 다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던 그였다. 물론 팀원들은 그런 팀장의 의견에 이미 동의를 한 상황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것부터 먼저 정리해서 내일까지 보고서로 제출해."
병세의 책상 위에는 무수히 많은 파일철이 올려져 있었고 팀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팀원들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스마트폰으로 단톡방에 병세의 반응을 궁금해하는 이모티콘을 올리기 바빴다.
그때 병세가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제가요?"
병세의 대답에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인가 싶은 팀장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고는 자신의 앞에 선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제야 팀원들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찍어대기 바쁘던 손가락을 멈추고 병세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팀장을 포함한 팀원들은 병세의 달라진 눈빛과 달라진 복장과 달라진 태도에 깜짝 놀랐다. 육 개월의 휴직동안 병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전부터 해왔던 일인데 뭐가 문제지?"
하지만 질 수 없는 팀장이 그를 향해 애써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왜요?"
두 번째 대답마저 그전의 병세라면 할 수 없는 답이었기에 팀장은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흥분한 팀장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다음 말을 하려던 순간 병세가 크게 말했다.
"먼저, 다들 메일부터 확인하시죠.
유전무죄 로펌에서 어젯밤 자정을 기해 발송했는데
역시 확인을 안 했군요."
팀장이 먼저 자신의 메일함을 열었다. 병세의 말처럼 자정에 발송된 메일은 유전무죄 로펌 빅토르 최 변호사에게서 온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팀장이 메일을 열어 첨부파일을 확인했다.
파일은 총 세 개였다.
장기간에 걸친 직장 내 괴롭힘과 학대, 폭언으로 인한 민사 소송, 형사 소송, 회사 인사위원회에 제출할 징계건의안이 그것들이었다. 방대한 양의 소송 자료와 구체적인 증거 그리고 소송액을 확인한 팀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물론 각각 자신에 해당하는 소송파일을 확인한 팀원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본 병세는 지금 이 모습을 봤으면 가장 기뻐했을 미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신의학과 진단서를 가지고 로펌에서 지정해 준 빅토르 최 변호사와 만났을 때 미리내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자."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지만 이 업계 특성상 내부고발자가 되면 앞으로가 힘들어져요.
그래서 저는 그들의 숨통을 쥐고 언제든 끊어놓을 수 있다는 조바심 속에 살게 하고 싶어요."
"그게 의뢰인의 요구라면 그대로 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의 복수를 위해 업계 최고인 빅토르 최 변호사와 병세, 미리내는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민사, 형사, 회사로 대비책을 준비했고 이미 수임료가 지불된 사건으로 법원과 회사에 제출하는 것은 언제든 병세가 원하는 시점으로 정해두었다.
서 있는 병세를 제외한 직원들은 메일함을 연 순간부터 넋이 나가 있었다. 유전무죄 로펌의 빅토르 최라니..
팀장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구조안전기술팀 내부가 정적으로 가득 찬 순간 병세가 말했다.
"보시다시피 제 말 한마디면 지금이라도 소송은 접수가 됩니다."
병세가 들어 올린 스마트폰에는 이미 빅토르 최라고 저장된 번호가 화면에 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입사동기인 이대리가 금방 무릎이라도 꿇을 듯이 다가와 그의 옷자락을 붙들려다 그 순간에도 에메랄드 제품인걸 확인하고는 멈칫했다. 그런 그녀를 혐오스럽게 바라본 그가 다시 말했다.
"팀장님. 제 요구 사항은 간단합니다.
제가 올린 부서전출 요청서부터 결재하세요.
소송은 제가 새 부서에 자리 잡은 후 제가 다시 검토하죠."
그의 말에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던 팀장은 떨리는 손으로 회사 결재함을 열어 그가 올린 요청서에 결재키를 승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