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여줄 남자.
17화. 그녀가 그에게 원하는 단 한 가지.
원형탈모로 듬성듬성했던 병세의 머리칼이 다시 채워지는 동안 그의 마음에도 속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노래방에서 처음 들었던 날 그는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날 이후 빨래를 개킬 때도 밥을 할 때도 귓가에 그녀의 노랫가락이 들려오는 것 만 같았다. 귀에는 그녀가 사준 에어팟에서 다른 노래가 흘러나왔지만 그의 마음에서는 언제나 그녀의 노래가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그의 마음속에서 무한 재생되는 멜로디였다.
그의 복직이 한 달쯤 남았을 때 미리내는 그를 이끌고 노래방에 데려갔다. 익숙하게 노래방 카운터에서 소주를 주문한 그녀는 둘이서 좁은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 망설여지는 그를 잡아끌고 노래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간.. 내가 골라준 거 많이 들었지... 이제부터 부르는 거야."
그녀가 빠른 속도로 선곡을 하는 동안 카운터에 주문했던 소주와 간단한 마른안주, 생수가 쟁반에 담겨 노래방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익숙하게 소주병 뚜껑을 딴 그녀가 소주 두 잔을 따라 그중 한 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나 때는 뱀사골 폭포 밑에서 득음한다고 판소리 열두 마당 피 토하면서 불렀는데
여긴 폭포가 없으니까. 대신 이걸로 하자. 숫자 나온다.. 시작해."
그녀가 억지로 쥐어준 마이크를 든 병세는 음과 가사는 알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얼어서 입만 벙긋 거리는 그를 답답하게 쳐다본 그녀가 마이크를 들고 그 대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청아한 목소리가 빛줄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병세는 그런 그녀를 신기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이제 같이 불러보자. 응?"
언제나 모든 일이 그렇듯 처음이 어려운 것이었다. 그녀를 따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병세는 그녀와 날마다 노래방에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하자 노래를 곧잘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자신이 노래를 잘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병세는 자신감도 붙기 시작했고 흐뭇하고 대견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도 좋았다.
그날도 저녁을 먹고 난 뒤 노래방에 가자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라나선 그였다. 하던 대로 카운터에서 계산을 마친 그녀가 그와 노래방 안으로 가기 위해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건장한 체격의 남자 세 명 중 한 명이 굳이 한쪽으로 비켜주려는 병세의 어깨에 몸을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어깨를 문지르며 병세가 먼저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다. 캡모자를 쓴 미리내가 왜 사과를 하냐는 험악한 표정으로 병세를 쳐다보았고 부딪힌 남자 중 한 명이 손으로 미리내의 캡모자를 올려쳐서 떨어뜨렸다.
"어쭈, 이 새끼 봐라. 너네 원조교제냐?
딱 봐도 고삐리 내.
야.. 얼마면 되냐. 나 돈 많아."
모자가 떨어지며 미리내의 얼굴이 드러나자 시비를 건 무리 중 한 명의 눈동자가 순간 커졌다. 그는 곧바로 미리내의 손목을 붙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그 순간 병세가 그 손목을 쳐서 미리내와 그를 떨쳐놓았다. 이번에는 병세의 행동에 놀란 미리내의 눈동자가 커졌다. 불시에 팔목을 가격 당한 남자는 곧바로 주먹을 날려 병세의 얼굴에 꽂았다. 얼굴에 가해진 타격감에 순간 주저앉은 병세가 얼굴을 붙잡고 일어서려 했을 때 그의 복부로 발차기가 날아왔다.
미리내는 잠시 고민했다. 절대로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는 삼신과의 약속이 있었기에 이 날파리 같은 것들을 어찌해야 할지 그녀가 망설이든 동안 두대나 얻어맞은 병세를 보고 그녀는 순간 사람만 안 때리면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그녀는 공중으로 몸을 박차고 뛰어올라 노래방 호실이 걸려있는 팻말표를 발로 차서 병세를 때린 남자 얼굴에 명중시켰다. 6호실 팻말은 그대로 남자의 콧뼈를 부수며 얼굴 전체에 치명상을 입혔다.
소란이 일자 경찰을 부른 노래방 주인의 신고로 미리내와 남자 일행은 안면부 출혈이 심해서 병원으로 옮겨진 한 명을 제외한 채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남자들은 연행될 때부터 경찰서에 도착해서까지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그 말에 억울한 병세가 먼저 때린 건 저 사람들이라고 항변했지만 상대측의 피해상황이 더 심각한 상황이었기에 경찰은 정확한 조사를 위해 노래방 CCTV 영상을 가져와야 했다.
"영상 봐보세요. 저 미친년이 사람을 병신을 만들었다니까요."
남자 둘은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보란 듯이 경찰에게 소리쳤다. 그들이 소란을 피우거나 말거나 미리내는 의자에 앉아 딴청을 피우고 있었고 불리해져 가는 상황에 병세는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 이게 뭐지?"
영상을 보던 경찰이 화면을 다시 정확히 보려는 듯 화면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경찰관의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영상이 재생되는 화면에 집중되었다. 녹화된 영상 속에서 미리내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먼저 남자들이 벽 쪽으로 피해 걷는 병세를 때린 후 6호실 팻말이 저절로 떨어져 나와 남자의 얼굴에 꽂히는 장면만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제야 자리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미리내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 사람들 정상이 아닌 것 같죠. 좋은 술 똥꾸녁으로 잡숫고 개꿈이라도 꾸셨나.
왜 애먼 사람은 잡는데요. 경찰 아저씨 보셨죠.
이 사람들이 이 남자 먼저 때린 거요. 조사 제대로 해주세요. 진단서는 내일 제출하죠."
얼이 빠져 그녀를 쳐다보는 병세의 팔목을 붙들어 자리에서 일으킨 그녀가 그를 데리고 일어서자 남자 둘이
이건 조작이라며 그들은 잡으려 했다.
"명백히 가해자가 가려졌는데 어딜 가려고.
김순경 이 사람들 유치장에 구금해."
그녀에게 이끌려 경찰서를 빠져나온 병세는 두 눈을 비비고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를 마주 본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가자. 가서 얘기해 줄게."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거실 소파에 앉은 그녀가 그대로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병세야. 너 핸드폰으로 나 사진 찍어봐."
병세는 그녀의 말에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그녀가 앉아 있는 소파 쪽을 사진으로 찍었다.
'찰칵'하는 촬영음이 들리자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이제 찍은 사진을 봐봐."
순간 사진을 확인한 그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사진 속에는 소파와 거실만 찍혀있을 뿐 그녀는 없었다.
"당신... 뭐예요?"
병세는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를 납득시킬 시간이 조금은 더 있을 줄 알았어.
이제 어쩔 수 없네.
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난 이제 몇 달 뒤면 소멸돼.
연기처럼 지금은 눈에 보이지만 곧 흩어질 존재란 뜻이지.
그래서 그 어떤 기록에도 남지 않는 거야.
처음에 삼신이 했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나도 알지 못했어.
하지만 셀카에 내 모습이 담기지 않는다는 걸 아는 순간 그 말을 이해했지."
-"소멸된다고요? 그럼 제가 해줘야 한다는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그의 말에 미리내가 바닥에 주저앉은 그에게 다가와 눈을 맞춘 채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마침내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뜬 그녀가 가슴속에 품고 있던 단도를 그의 앞에 꺼내 들었다.
눈앞에 단도를 든 그녀를 본 그가 기겁을 해서 앉은 채로 뒤로 물러났다.
"아니야. 죽어달라는 게 아니야.
죽여달라는 거지.
올해 12월 31일 자정이 되기 전 네가 내 심장에 칼을 꽂는 것만이
내 소멸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