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여줄 남자.

16화. 병세동생, 담력 기르기(3)

by 묭롶

"열어봐."


미리내는 빨래를 개키는 병세 앞으로 조그마한 쇼핑백을 내밀었다.


-"뭐예요?"


이번에는 또 뭔가 싶어서 선뜻 쇼핑백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미리내의 얼굴부터 살피는 병세였다.


"직접 봐."


그는 그제야 쇼핑백에 손을 집어넣고 안에 담긴 내용물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안에 있던 내용물은 최신형 아이팟이었다. 지하철에서 젊은 친구들이 귀에 꽂고 있는 건 많이 봤지만 실제로는 만져보지 못했던 그는 그 물건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내 테이블 위에 놓인 병세의 스마트폰을 손에 든 그녀는 이것저것 만지더니 그의 손에 폰을 돌려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곡들로 담아놨어. 틈날 때마다 듣고 따라 불러."


비 오는 날 심야 공포영화 시청에 이어 이건 또 무엇인가 싶어서 그는 고개를 들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중학교 때까지는 그렇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고등학교 일 학년 이후로

그는 그 자신 속으로 고립되어 갔다. 참 희한하게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썩은 음식에 꼬이는 파리처럼

스스로 약해진 병세는 그때부터 학교 대표 '병새(병신새끼)'가 되었다. 그는 누가 때리면 맞고 괴롭히면 그냥 가만히 있었다. 왜 무엇을 위해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목소리를 낸다 한들 누가 나서서

그를 도울 것 같지도 않아서 그는 스스로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는 그저 묵묵히 말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공부만 했다. 그런 이유로 목소리를 내지 않는 그가 노래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엄마가 신부전을 앓기 시작하면서 생계까지 걱정해야 했던 그는 어떻게든 빨리 취업을 해야 했고 그는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경우에만 목소리를 내었다.


포장된 아이팟 케이스에서 아이팟을 꺼내 한 개는 그의 귀에 꽂고 다른 한 개는 자신의 귀에 꽂은 그녀가 스마트폰에 담긴 음원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내 싱어송라이터로 유명한 솔로 여가수의 신곡이 귀에 들려왔다. 아이팟을 통해 들려오는 곡이 마음에 드는지 미리내는 박자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병세는 숨겨왔던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 보인 것만 같아서 얼굴이 붉어졌다. 상기된 그의 모습을 본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병세를 살폈다. 그녀의 큰 동공에 병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눈동자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는 그 안에 미리내의 진실이 숨겨져 있기라도 하듯 한참을 멈춘 채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순간 병세가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물었다.


-"제게 왜 이렇게 잘해줘요?"


그의 물음에 스마트폰 재생 버튼을 일시 멈춤으로 터치한 그녀가 그에게 답했다.


"말했잖아. 네가 나에게 해줘야 할 한 가지가 있다고."


-"그게 뭔데요?"


"그건 지금의 너는 할 수 없어. 그러려면 넌 더 강해져야지."


그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뭘 위해서 자신이 강해져야 하는지 또 자신이 그녀를 위해 뭘 해줄 수 있는지....... 하지만 그녀는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이내 뭔가가 떠오른 듯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 그녀가 방안에 들어가 캡모자를 들고 나와 그의 팔뚝을 잡고 흔들었다.


"가자... 가자고...."


-"예? 또 어딜요?"


"그러게 일단 가자고."


다시 병세의 손에 든 스마트폰을 뺏어 들고 음원의 재생버튼을 누른 미리내는 그의 귀 한쪽에 남은 아이팟 한쪽을 마저 끼워주고는 그를 끌고 현관문을 열어 바깥으로 나왔다. 병세는 오늘도 그녀에게 이끌려 택시를 탔다. 그녀와의 동행은 언제나 일방적이고 충동적이었다. 그녀가 내키는 대로 그는 정신과 전문의에게로 끌려가서 검진을 받았고 사진을 찍었으며 변호사를 만나 상담을 받고 사무장에게서 다음 스케줄을 안내받았으며 그녀가 먹고 싶은 연탄구이집을 순회해야 했다.

오늘 그녀에게 이끌려 그가 도착한 곳은 에이스백화점 2층에 있는 명품관이었다.

그곳에는 국내 단 두 곳만 입점됐다는 브랜드 에메랄드가 있었고 이미 명품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주눅부터 든 병세를 미리내는 질질 끌다시피 해서 에메랄드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에이스백화점에서 유일하게 복층으로 구성된 에메랄드 매장은 천장에 수천 개의 크리스털로 장식된 샹들리에가 실내를 우아하게 밝히고 있었다. 명품계의 명품을 브랜드 가치로 내세우는 매장에 걸맞게 우아한 태도와 우아한 복장으로 단장한 직원들이 도열해 있었고 이 매장의 브랜드 매니저인 김실장은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쌍의 커플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딱 봐도 어린년이 벗겨먹으러 왔네.

비주얼로 봐서는 스카프 하나 사주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뭐를 사주려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고객을 몇 초만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김실장이 스캔하는 동안 도열해 있던 직원 중 한 명이 그들에게 다가가 응대를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보시는 상품이 있으실까요?"


미리내의 뒤에 숨어서 그녀의 옷자락을 끄집어 잡아당기며 다시 나가자며 보채는 병세에게 뒤돌아 험악한 눈짓을 한 그녀가 직원에게 거침없이 말했다.


"여기 뒤에 있는 동생 옷 좀 사려는데요."


미리내의 말을 들은 브랜드 매니저 김실장은 순간 손에 들고 있던 볼펜을 데스크에 떨어뜨린 채 안경코를 손가락으로 추겨 올리고는 그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뭐야? 저 샌님이 저 여자애 사주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동생이야?'


자신도 모르게 호기심에 끌린 김실장은 대놓고 그들을 빤하게 쳐다보다 정신을 차리고는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수정 씨, 여기 내가 안내해 드릴게요."


아무래도 직접 응대를 해보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더 잘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호기심을 못 이긴 김실장이 나섰다.


"동생분 옷을 보신다면 슈트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매장 안을 둘러보던 미리내가 양복이 디스플레이된 마네킹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이거 좋네요."


슬쩍 매장 안에 진열된 넥타이 가격표를 몰래 확인한 병세는 가격표의 동그라미를 본 순간 이미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냥 봐도 구매능력이 의심스러운 고객의 피팅요구에 김실장은 괜히 비싼 물건에 흠집이 생길까

걱정이 되었지만 이번에는 호기심이 승자였다.


"그럼 피팅룸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와이셔츠와 양복 상, 하의를 이미 준비한 김실장이 얼음이 되어 있는 병세에게 피팅룸을 가리켰다.

넓은 피팅룸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을 보면서 병세는 그전과 다르게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신기하기만 한 그는 아무래도 같이 지내다 보니 그녀를 닮아가는 것만 같았다.

평생가야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할 브랜드를 병세는 그렇게 만나게 되었다.

옷을 갈아입은 병세가 쭈뼛거리며 피팅룸 문을 열고 매장으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미리내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를 보고 외쳤다.


"오우. 좋네. 저거 깔별로 다 주세요."


그녀의 말에 얼이 빠져 있던 김실장은 미리내가 건네는 신용카드를 받아 들 생각도 못한 채 멍하게 서있다가 그녀에게 조심히 다가와 손가락으로 찌르는 매장 직원을 보고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매장 직원들이 부지런히 해당 사이즈의 상품을 준비하는 동안 미리내는 매장을 돌아다니며 벨트와 지갑, 넥타이와 손수건 등등을 가져와서 부지런히 계산대에 올려 놓았다. 과연 결재가 되는 카드일까? 혹시 허언증

환자는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 속에 카드리더기에 카드를 긁은 김실장의 귀에 띠르르륵 하고 카드 결제 승인음이 들려왔다. 도대체 저 아이는 뉘 집 금수저고 저 샌님은 누구란 말인가. 김실장의 호기심은 그들이 쇼핑한 물건을 양손 가득 들고 매장을 빠져나가는 순간까지도 해결되지 않았다.


명품백을 양손 가득 들고 에메랄드 매장의 문을 나서는 그들을 쇼핑객들은 경탄의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받은 병세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피팅룸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낯설었다. 그는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스스로 거울도 잘 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슈트를 입은 자신의 모습 속에서 그는 그전까지 갖지 못했던 자신감을 발견했다. 스스로 빛나보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그녀가 신기하기만 해서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옆자리에 앉은 미리내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말없이 그에게 왜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옷은 왜 사준 거예요?"


"응. 내가 요새 게임을 하나 하는데 아이템빨이 최고더라고.

내가 제일 없는 게 시간이라서 말이지.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사회생활에서는 복장이 아이템이지 싶어서.

내가 너 아이템 풀장착 해봤어.

너 어차피 복직해야잖아."


아버지가 떠난 이후 의지할 데 없이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병세는 그녀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보호받을 수 있는 존재란 사실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그는 그녀의 말에 사람이 살지 않는 오래된 폐가에 전등 하나가 켜진 듯 마음 한켠이 밝아져옴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에도 반짝이는 빛이 살아났다. 그의 눈동자에 켜진 불빛을 본 미리내는 그를 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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