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병세동생, 담력 기르기(2)
"가자.. 빨리 가자고..."
미리내가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는 병세를 뒤에서 재촉했다. 손에 거품이 묻은 채로 고개만 뒤로 돌린 병세가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를 뒤돌아 보았다. 캡모자를 푹 눌러쓰고 옷까지 다 갖춰 입은 그녀가 서두르라며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비도 오는데 어디 가게요?"
"비가 오니까 딱이지. 빨리빨리."
그녀의 성화에 못 이긴 그가 주방에서 쫓겨 나오듯 튕겨 나와 방으로 들여보내졌다. 이미 밤 열 시가 되어
가는데 어딜 가자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는 마지못해 외출복으로 갈아 입고는 거실로 나왔다. 그런 그의 팔을 나꿔챈 미리내는 현관문을 열고 대로변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잡아 탔다.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나 그녀가 원하는 곳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통에 이제 병세는 어디를 간다 해도 놀랍지 않을 거라고 택시 안에서 생각했다. 택시는 영화관 앞에서 멈춰 섰다. 굵은 빗줄기가 우산을
두들기는 가운데 높은 습도로 시내는 안개가 자욱했다. 어릴 적 봤던 TV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 무덤이 갈라지고 귀신이 나올 때와 같은 조건과 딱 맞는 상황이어서 병세는 절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왠지 그는 웃으며 편의점에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도 무서웠다. 편의점에 들어선 미리내가 신이 나서 플라스틱 소주 세 병과 스트로우 세 개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편의점 점원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모자 아래 그녀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피자 미리내는 신분증과 신용카드를 직원에게 건네주었다. 그제야 검정 비닐봉지에 담긴 소주를 챙긴 그녀는 또다시 병세를 끌고 영화관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영화관에 도착하자마자 매점으로 달려간 그녀는 빠른 속도로 핫도그와 팝콘을 주문했다. 병세는 그런 그녀 뒤에서 뻘쭘하게 서서 무슨 영화를 보려고 저러나 싶어 물어볼 기회만 살폈다. 직원이 내어준 음식을 챙긴 미리내가 티슈를 챙기러 음료 데스크로 왔을 때 그가 물었다.
"뭐 보려고 그래요?"
티슈를 뽑다가 고개를 들어 올린 미리내가 그를 보며 씩 웃었다.
"뭐 볼 것 같아?"
-"그러게요."
"날씨 봐봐. 이런 날에 뭘 봐야겠어?
담 키우는 데는 공포영화 만한 게 없지.
내가 검색에 검색을 거듭해서 엄선한 영화야."
미리내가 말을 하기가 무섭게 영화관의 메인 화면에서는 엑소시스트 디렉트 컷의 예고 화면이 딱 맞춰서 재생되고 있었다. 마침 바깥에서 번개가 번쩍했고 잠시 후 천둥이 우르르르 쿵 하고 울렸다.
"오오오.. 제대론데...."
신이 나 있는 그녀의 모습과 상반되게 어쩌다가 한 번 본 전설의 고향이 무서워서 밤마다 '내다리 내놔'가 꿈에서 나와 이불에 오줌을 적셨던 병세는 천둥과 함께 정신이 탈출하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챙긴 그는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했지만 이미 그녀에게 팔목을 붙들린 뒤였다. 언뜻 보기에 뼈만 야위어 보이는 그녀의 팔뚝은
쇠와 같았다. 같이 부딪힌다면 자신의 뼈가 산산이 부서질 것만 같은 쇠막대에 체포당한 병세는 다른 한 손에 팝콘 통을 들고 속수무책으로 상영관으로 입장을 해야 했다.
영화는 디렉트컷이 무엇인지를 친절하게 설명하듯 적나라했다. 공포영화의 공식처럼 주인공들은 가지 말라는 곳을 갔고 하지 말라는 것을 했으며 그렇게 한 명씩 죽어 나갔다. 미리내는 극장 의자에 앉자마자 플라스틱 소주병을 열고는 플라스틱 스트로우를 꽂아 넣고는 병세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검색을 해봤는데 극장에서 공포영화 보면서 마시는 소주가 그리 맛나데."
영화가 관객들에게 롤러코스터와 같은 공포행 특급열차를 선사하는 동안 병세는 영화를 보던 도중 놀라서
팝콘을 집어던지고 의자 위로 발을 올리고 몸을 폴더처럼 접어서 자라처럼 무릎 사이로 자신의 목을 집어넣었다. 무서운 장면이 지나갔나 싶어 무심코 옆 자리에 앉은 미리내를 바라본 그는 연신 웃으며 핫도그를 신나게 베어 먹으며 빨대로 소주를 쭉쭉 빨아 마시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옆 사람과 같은 장르의 영화를 보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코미디 영화를 보는 듯 장면마다 웃는 그녀를 보는 편이 공포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는 남은 시간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가 뒤엎은 팝콘의 잔해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남은 핫도그 한 개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영화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미리내가 병세에게 말했다.
"이거 공포영화 맞는 거지?
왜 이렇게 웃기는지 모르겠네.
내가 살던 지리산에 가봐.
맨 무덤이고 맨 귀신인데
난 귀신보다 일본군이 더 무숴."
영화가 끝나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일어서는 병세의 어깨를 미리내는 '참 좋은 세상 산다'는 듯이 툭툭 두들겼다. 한편으론 생존을 위해 시대적 공포를 실시간으로 겪으며 살았던 자신의 시대와 공포를 일부러 느끼기 위해 영화를 보는 지금 시대를 비교해 보는 그녀였다. 자신이 살던 곳은 수시로 죽음의 위협이 가득했고 굶주림과 학대가 빈번했으며 사람들에게 자아는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병세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고립된 자아라는 성안에서 나와 타인의 구분이 없이 모두가 심지어 그 자신조차 자신에게 가해자가 되는 그런 곳이었다. 과연 어떤 곳이 더 지옥일까?
영화관을 빠져나온 미리내는 자신의 뒤에서 아직도 겁에 질려 그녀의 옷자락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잡고 있는 그가 의식되었다.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어쩌면 한심하고 불쌍하게만 보이던 뒤에 있는 인간을 왠지 오늘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그녀였다.
'아무래도 날씨 탓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