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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Feb 15. 2024

모르면 뒤통수 맞는 영국 직장생활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원래 이 글의 제목은 "회사에서 배신당했습니다."였다. 억울해서 미쳐버리기 전에 회사에서 다행히 정신 차리고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고, 이 성취를 모두와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취업 비자라는 '행복의 족쇄'

나는 작년 10월에 회사에서 취업 비자를 받았다. 이젠 '워홀러' 딱지를 떼고 정식으로 영국 정부에서 인정해 주는 적법한 신분의 노동자가 되었다. 요즘처럼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민자를 제한하는 추세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성취였다. 

회사에서 3년짜리 비자를 지원해 주었는데, 대신 2년 반 안에 관두게 되면 회사가 지불한 비자 비용의 50%를 부담해야 한다는 계약서에 사인을 해야 했다. 사실 나에겐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 조건에 동의를 했고, 나는 어떻게든 지금 회사에서 영주권이 나올 때까지 잘리지 않고 버텨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취업 비자는 나와 같은 외국인들에겐 아주 큰 기쁨이자 성취임과 동시에 발목에 찬 족쇄와 같다. 그만두고 싶어도 비자 때문에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변을 보더라도 취업 비자에 묶여서 이직을 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을 꽤 많이 봤다. 영국에서는 2년마다 이직을 하면서 연봉을 많이 올리는 편인데, 사실상 회사에서 취업 비자를 받는 외국인들은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비자 스폰을 받아서 정말 행복했다. 워홀 비자로 왔을 때부터 이 취업 비자를 받기만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언제나 찾아오는 But...

개인적으로 2023년은 나에게 굉장히 많은 것을 이룬 한 해였다. 한국에서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시작했고 업계나 직무에 대한 지식이 없는 채로 입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료들, 임원들이 직접 뽑은 '이달의 직원상'을 받았다. 그리고 큰 클라이언트들로부터 우리 회사, 그리고 특히 내가 담당 어카운트 매니저로서 해주는 서비스가 좋다는 공개적인 증언을(Client Testimonial) 받기도 했다. 회사 창립 이래로 영국/유럽 지역에서의 첫 Client Testimonial이었다. 성과도 당연히 좋았다. 분기별 목표를 모두 초과 달성했고, 특히 1년 내 가장 중요한 Q4에서 109%를 달성해 팀에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내가 직접 클라이언트들과 협상해서 따낸 광고비가 전체 금액의 50%를 차지했는데, SVP가 (우리나라로 치면 전무) 연말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칭찬을 해주기도 했다. 

 

1월 중순에 매니저와 퍼포먼스 리뷰가 있었다. 입사할 때 사실 '연봉 협상'이랄 게 없이 왔기 때문에 2023년에는 성과를 보여주고 2024년에는 그에 따른 연봉 인상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내가 이뤘던 성과들을 숫자로 다 정리해서 내가 2023년에 회사와 팀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매니저에게 쭉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연봉 인상을 해줄 수 있겠냐고 물어봤다. 그런데 매니저의 첫마디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We sponsored you the visa." (우리가 너 비자 지원 해줬잖아)


너무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이라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매니저는 이후 말을 쭉 이어갔다. 내가 성과를 초과 달성한 것도, 잘한 것도 맞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나의 비자 스폰에 큰돈을 투자했기 때문에, 연봉 인상률이 원래 받아야 할 수준보다 낮을 거라고 했다. 더 서운했던 건 그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이야기하던 매니저였다. 일단 알겠다고 하고 나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억울해도 너무 억울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연봉을 떠나서 배신감이 느껴졌다. 뒤통수를 정말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가마니의 반란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말보단 글에 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 조심스럽게 메모장을 켰다. 그리고 정당하게 내가 하고 싶은 말들, 짚고 넘어가야 할 말들을 써 내려갔다. 내 주요 포인트는 4가지였다.

1. 회사가 많은 돈을 투자하여 나에게 비자 지원을 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연봉 인상분에 비자 비용이 고려된다면, 결국에는 내가 직접 비자 비용을 부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 이미 비자 금액 환수 계약서에 동의를 했고 사실상 회사에 3년 동안 헌신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도 큰 희생이고 의무이다. 만약 내가 회사를 3년 안에 관두게 되면, 나는 환수 금액에 연봉 인상분을 이중으로 지불하는 것이 된다.
3. 이에 대해 전혀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자 비용이 연봉 인상에 반영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미리 알려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 성과에 대한 연봉은 오로지 성과와 회사의 기여도만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회사에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목표를 달성했고, 이에 대한 보상은 다른 동료들과 동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나보다 여기서 직장생활을 오래 한 친구들, 그리고 영국인 남자친구의 도움까지 받아서 한 땀 한 땀 써 내려간 메일을 매니저한테 보냈다. 회사에 입사한 이후로 어떻게 보면 처음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문득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된다는 말이 생각났다. 뒤통수를 맞았을지언정, 절대 가마니가 되고 싶지 않았다. 매니저에 답장이 왔다. 시니어 레벨들에게 내 메일을 전달했다고, 피드백 주겠다고 했다.



반란 이후 협상된 평화

그러고 3주가 지났다. 매일 배신감과 현타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을 하고 싶은 동기부여도 모두 사라질 즈음, 다행히 미리 계획했었던 12일의 긴 휴가를 다녀와서 머리를 잠시 비울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남자친구는 만약 원하던 피드백과 결과를 받지 못하더라도 괜찮다며, 참지 않고 원하는 것에 대해 목소리를 낸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다고 해주었다.


그런데 오늘, 매니저가 잠깐 10분 미팅을 갖자고 했다. 그녀는 좋은 소식이라며 활짝 웃었다. 팀에서 인사팀을 푸시했고, 나를 평균 인상률보다 더 많이 올려주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 그리고 추가로 800주의 회사 주식을 주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도 비로소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인상률은 내가 처음의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지만, 또 궁금증을 참지 못해 구글에 검색해 보니 그래도 이 정도면 Exceptiona한 인상률이라고 한다. 


매니저에게 만족하고 기쁘다고, 고맙다고 했다. 매니저는 웃으면서 '이제 더 열심히 일할 수 있겠네'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월급으로 계산하면 그렇게 큰 차이도 나지 않는 금액인데 그게 뭐라고 이렇게 사람 기분을 롤러코스터를 타게 만드는지... 그래도 그동안의 모든 허탈함과 실망감이 조금 떨쳐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배웠다. 가만히 있으면 진짜 가마니가 되는 것이라고. 내가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면 이뤄낼 수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했다. 





비자 하나에 모든 운명이 걸려있는 외국인은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가끔은 조심스럽다. 만약에 회사에서 '어쩌라고? 그럼 퇴사하든지'라는 마인드로 나왔어도, 나는 현실적으로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뒤통수를 맞고 속으로 혼자 억울해하는 것보다는, 내가 그냥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바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최소한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편이 훨씬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해외에서 생활하다 보면 이렇게 부당한 일을 종종 겪곤 할 텐데 그럴 때마다 가만히 있지 말고, 설사 내가 뻔히 지는 게임이더라도 꼭 큰 소리 내며 살아야겠다고 느낀 하루였다. "야 너 지금 나 때렸?"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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