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한국의 다른 직장문화 4가지
나는 늘 미디어에서 접하는 '유러피언 라이프스타일'을 동경했다. 자유롭고 수평적인 분위기, 퇴근 후 여유로운 삶, 가족 중심적인 문화 등 한국에서는 모두가 누리기 힘든 가치들 때문이었다. 특히 수직적 문화와 야근이 일상화된 업계에서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나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한국을 떠나 영국으로 오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같은 지구에 살고 있음에도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듯한 유러피언들이 부러웠다. 나도 영국에 살게 되면 그들처럼 살 수 있을지 궁금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상상만 하던 그 삶을 실제로 살고 있다. 영국에서 일을 시작 한 지 어느덧 3년 차가 되었고 가끔 나도 모르게 K-직장인 마인드가 불쑥 고개를 내밀곤 하지만, 한국에서의 7년 직장 생활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이곳의 방식에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다. 나도 이제 '유러피언처럼 일하는 법'에 적응하고 있는 중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직장 문화와 가장 다르다고 느꼈던 4가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저녁+a 가 있는 삶
한국에서 6시 정시에 퇴근한 적은 7년 동안 손에 꼽을 정도였다. 바쁜 시즌에는 물론 새벽 퇴근 할 때도 있었다. 영국에서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야근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우리 회사는 모두가 5시에서 6시 사이에 자유롭게 퇴근을 하는 분위기라 저녁 약속이 있거나 일정이 있는 경우에는 일찍 퇴근해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하루는 동료가 평일 저녁에 콘서트를 보러 가야 한다며 4시 30분쯤 정도에 퇴근했는데 모두의 축복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떠났다. 특히 모두가 재택근무를 하는 금요일은 대부분 반쯤 정신을 놓고 일을 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금요일 오후 3시 이후에 보낸 메시지는 답장을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몇몇 회사들은 Summer Friday라고 영국 여름의 절정인 4월 말부터 8월까지는 오후 1시에 모든 직원이 퇴근을 하는 제도를 도입하기도 한다. 처음엔 이렇게 자유롭게 출퇴근하는 문화가 정말 큰 충격이었다. 한국에서 눈치를 보는 습관 때문에 자유롭게 퇴근하는 동료들을 보고도 꼭 6시까지 시간을 채우곤 했고 아무도 열심히 일하지 않는 금요일에도 혼자 바쁘게 일했다. 2년이 지난 지금은 훨씬 여유로워졌다. 바쁘지 않은 날에는 일찍 퇴근하기도 하고, 금요일에는 4시쯤에 자체 퇴근(?)해서 주말을 일찍 맞이한다. 영국에 오고 나서는 '저녁이 있는 삶' 그 이상을 누리고 있다. 덕분에 퇴근 후 운동을 하고 집에 들어가도 저녁을 직접 요리해 먹을 시간이 있고, 그 후에 영화 한 편을 즐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까지 생겼다. 영국에서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직장'이라는 것은 내 삶을 영위해 주는 수단일 뿐이고 퇴근 이후의 삶이 훨씬 더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프면 당연히 쉬어야죠
한국에서 병가는 늘 무급이었고 병가를 제출하려면 꼭 진단서 같은 증빙 서류가 필요했다. 그래서 대부분 아프면 개인 연차를 써서 하루 이틀 쉬곤 했었고 그 마저도 굉장히 눈치를 봤었다. 영국은 병가 제도가 굉장히 잘 마련되어 있다. 법적으로 7일까지는 구두상 통보로 가능하고 아무런 서류를 제출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당연히 유급이다. 몸이 안 좋으면 상사와 인사팀에 이야기를 하고 괜찮아질 때까지 푹 쉬다 올 수 있다. 게다가 대부분은 재택근무가 자유로운 편이라, 일은 할 수 있는 정도이지만 사무실로 출근할 컨디션이 안 될 경우에는 그냥 편하게 재택근무 하겠다고 하면 된다. 그리고 근무시간 중에 잠시 병원에 다녀오는 것도 한국에서 처럼 점심시간을 이용한다거나 반차를 쓸 필요 없이 상사의 허가만 받고 다녀오면 된다. 대부분 아무 말 없이 보내주는 편이고 오히려 그걸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비인도적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상사의 허락을 받지 않고 본인 일정에 맞게 알아서 다녀오는 경우가 더 흔한 것 같다.) 나도 얼마 전에 감기가 걸려 컨디션이 굉장히 안 좋았는데 이틀 병가 내고 푹 쉬고, 그 이후에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쭉 재택근무를 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상사와 동료들은 컨디션이 어떤지 늘 물어봐주었다. 몸이 더 안 좋으면 언제든지 이야기 하라며,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콕 짚어서 어디가 아프지 않더라도, 정신적으로 휴식이 필요할 때에도 병가를 쓰는 게 가능하다. 아프거나 일할 컨디션이 아닐 때 과감히 쉬는 것 - 지금 생각하면 정말 당연한 근로자의 권리인데 한국에서는 왜 그렇게 어렵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연차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영국은 법적으로 1년에 8일-10일 공휴일을 포함하여 28일의 유급 휴가가 보장된다. (영국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휴가 개수가 적은 편이다.) 우리 회사는 공휴일을 제외하고 25일이 기본으로 나오고 1년 근속할 때마다 하루씩 늘어난다. 물론 무제한은 아니고 30일까지 늘어나서 5년 이상 근속한 사람은 공휴일 포함하면 1년에 거의 40일을 쉬는 셈이다. 한국에서 일할 때에는 휴가를 가도 5일 이상 연차를 쓴 적이 없었다. 심지어 첫 회사에서는 마치 학교 방학처럼 다 같은 기간에 우르르 쉬어야 해서 다른 선택권이 없었던 적도 있었다. 혹시나 추석이나 설날 연휴에 다른 공휴일과 겹쳐 '황금연휴'가 생겨나도, 앞 뒤로 휴가를 더 붙여 쓰는 사람은 책상이 빠질 각오를 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한국 직장 생활에서는 연차 사용에 꽤나 제약이 많았고 늘 눈치 싸움을 해야 했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연차 사용은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100% 본인의 재량이다. 영국에서는 대부분 공휴일이 월요일이나 금요일이라, 많은 직장인들은 이 기간을 활용해 앞뒤로 연차를 사용하여 길게 휴가를 다녀오곤 한다. 그리고 모두가 그게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성수기를 피해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연차 사용이 자유로운 덕분에 올해만 해도 몰타, 폴란드, 그리고 웨일스에서 조용하고 한적한 휴가를 즐기다 왔고 6월에는 가족들이 모처럼 런던에 놀러 와서 2주 정도 연차를 내고 함께 여행하며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번달 말에는 친구를 만나러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짧은 휴가를 보낼 예정이고, 12월에는 크리스마스 연휴를 활용해서 1월 초까지 한국에 한 달 정도 다녀올 생각이다. 언제든지 원하는 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삶은 지금 나에게 너무나도 소중하다. 이젠 26일도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니까 말이다.
상사는 모시는 사람이 아니다
영국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버리기 힘든 'K-직장인 마인드'는 상사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과 태도인 것 같다.
한국에서는 나보다 높은 직급의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편한 회사 생활을 위해서는 필수였다. 특히 나는 한국에서 예민한 상사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러다 보니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하고 그들의 기분이나 의도를 눈치껏 알아차리는 데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영국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말로만 듣던 '수평적 문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인턴도 디렉터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동무를 하고 직급과 연차에 상관없이 친구처럼 지내는 동료들, 연차가 한참 낮은 직원도 스스럼없이 불만을 표현할 수 있는 문화 - 처음에 적응하는 데 꽤나 애를 먹었다. 수평적인 문화라고 해서 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도 업무 지시 할 때는 탑다운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직원들이 윗사람들의 결정에 불만이 있어도 그냥 군말 없이 따라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정치'도 존재한다. 상사 눈 밖에 나면 승진에서 제외되거나 반대로 잘 보이면 초고속 승진도 가능하다. 얼핏 들으면 한국의 직장 문화와 비슷하게 들리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영국은 그래도 '상호 존중'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직원들은 어디서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상사들은 이 의견들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상사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직원들의 신뢰를 얻고, 그들이 더 주도적이고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더 나은 업무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지, 직원들을 눈치 보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아직 가끔 상사의 눈치를 볼 때가 있지만, 이건 상사 때문이 아니라 나의 뿌리 깊은 K-직장인 DNA 때문이라 생각한다. 상사는 나의 성과를 평가하고, 필요할 때 서포트 해주며 내 선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는 사람이지, 내가 눈치 보고 기분을 살피며 극진히 모셔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내가 상사를 존중하는 만큼, 상사도 나를 존중하는 게 건강한 관계라는 것을 늘 가슴에 새기려 한다.
위에 언급한 4가지 말고도 영국과 한국의 직장 생활에는 다른 점이 정말 많지만, 결국 유러피언처럼 일한다는 것은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눈치 문화'가 너무나도 큰 역할을 하는 한국에서 '남 눈치 보지 말라'는 조언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한국과는 다른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유럽의 개인주의 덕분이라는 것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은 변화가 가지고 오는 나비 효과를 믿는다. 예를 들어, 직장 내에서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해 본다거나, 만약 내가 상사라면 직원들과 상호 존중하고 신뢰하는 분위기를 먼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런 변화들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꾸준히, 조금씩 실천하다 보면 언젠가는 바뀔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나는 비록 한국에서 행복하지 않은 직장 생활을 했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만큼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작은 변화부터 시작해 보길 바란다. 멀지 않은 미래에 한국에도 더 건강한 직장 문화가 자리 잡기를 희망한다.
* 쉬운 비유를 위해 '유러피언'이라 통칭해서 글을 썼지만 나라, 업계, 회사마다 직장 문화는 천차만별입니다. 한국에서도 좋은 문화를 가진 회사들이 많겠지요. (안타깝게도 제가 다닌 회사들은 아니었을 뿐이죠.. 하하) 이 글은 철저히 저의 경험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의견과 생각이며, 일반화하려는 목적이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바라요. 다른 나라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언제든지 편하게 댓글 달아주세요 :)
** 저의 영국 정착 이야기가 더 궁금하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