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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셜리 Mar 24. 2021

무슨 일 하세요? 그냥 회사원이에요

내가 내 직업을 숨겨온 이유

영어에서는 처음 만나면 이렇게 물어본다. "What do you do?" 직업을 묻는 단순한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나는 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 같은 게 방송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후진 회사를 다니는데 내가 편집자라고 해도 되는 걸까?' 생각의 끝에 내 입에서 나오는 대답은 늘 "그냥 회사원이에요"였다.




내가 이렇게 '회사원'이라는 대답으로 내 정체를 숨긴 것은 열등감 때문이었다. 내가 거쳐 온 2개의 직업은 '방송작가', '출판편집자'였지만 이 직업들의 이미지와는 달리, 내 실상은 초라하고 남루했던 것이다.


방송작가일 때 얘기를 해보자면, 나는 한낱 외주 제작사의 막내작가일 뿐이었다. '작가님'으로 불리지만 실제 하는 일은 전화하고 구걸하는 게 전부인 '작가나부랭이'요, 고용 신분은 프리랜서여서 회사에선 노트북도 제공받지 못하는 객식구이자, 월급 80만 원으로 시작한 극빈층인 나는 내가 봐도 너무 초라했다. 그나마 자부심 하나 가지고 그 수모를 견뎠지만 그 자부심마저 바닥나자 그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편집자인 지금은 어떤가. 6년 차가 되었지만 최저시급에서 조금 웃도는 월급을 받을 뿐이며 5인 이하 사업장이어서 연장수당도 제대로 못 받는다. 눈은 빠질 것 같고 손목은 시리지만 회사에서는 교정교열 기계쯤으로 취급받곤 한다. 자비출판사에서 일한 경력이 대부분이어서 기획출판사에서는 받아주지도 않으며, 간신히 들어온 기획출판사는 알고 보니 그냥 '기획사'여서, 편집기획자가 되겠다는 꿈은 점점 흐려져만 간다. 


어떻게 해도 나는 직업인으로서의 나를 자랑스러워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회사원이에요"라는 말이 편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친구와 얘기를 하다 이런 나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늘 충분하지 않은 느낌이라고. 직업인으로서 정점을 찍지 못했다는 마음에 괴롭다고. 그러자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어떡하면 만족할 것 같아?"


친구에게는 그냥 소박한 내 생각을 말했다. 그냥 정상적인 업무체계 속에서 내가 기획한 책이 하나둘 쌓여가는 걸 보고 싶다고. 그동안의 나의 노력은 그런 회사에 가서 일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최근에 이직한 곳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괴롭고 더 어떻게 노력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그것뿐일까 싶었다. 정상적인 업무체계라는 것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지금도 이미 정상적인 업무체계 속에서 일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꼭 기획한 책이 있어야만 편집자인 걸까? 이미 나는 200권 넘는 책을 고치고 다듬어서 세상에 내놓았는데. 기획과 섭외만 안 했을 뿐 그 책들을 소개하는 글도 내가 직접 썼고, 회사가 시키지 않았지만 내가 자진해서 그 책들의 카드뉴스나 상세이미지도 만들 만큼 몰두했었다. 편집자가 별건가. 이런 일 하는 사람이 편집자지. 그런데 이런 나를, 나만 편집자라고 불러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늘 '아무도 모르는 회사에 다니는 나부랭이', '주류가 되지 못하고 도태된 아류라는 콤플렉스'에 찌들어 진짜로 원하는 걸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남들이 알 만한 출판사에 가서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전까지는 나를 편집자라고 부르지 않으리, 다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송작가일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무한도전> 작가쯤 되어야 나를 작가로 불러줄 수 있다는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됐다. 나는 어디 가서 다른 일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방송을 만드는 작가였고, 지금은 책을 만드는 편집자다. 그런데 번듯해지기 전까지는 스스로를 제대로 소개하지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아마 나는 "저 편집자예요" 했을 때 "와, 대단하시다. 혹시 무슨 책 만드셨어요?" 같은 질문이 돌아올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아무도 내가 만든 책을 모르면 어쩌지, 하는 부끄러움 때문이다.


번듯함이라는 건 도대체 누가 정하는가. 그 누구도 남의 직업을 하찮다고 말할 권리는 없다. 아무도 모르는 출판사에서 아무도 모르는 책을 냈다고 해서 "저런 게 무슨 편집자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 생각일 뿐이다. 적어도 나만은, 나를 제대로 된 직업인으로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




이제 나는 어디 가서 편하게 "저 편집자예요" 하고 다닌다. 그러자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아, 내가 정말 편집자구나.' 그럼 내가 편집자지, 뭐겠는가. 나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편집자라는 직업을 이미 가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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