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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셜리 Jul 20. 2023

무질서의 공간에 질서를 만들면 그것은 원칙이 된다

손 하나 뻗을 공간 없이 사방이 막힌 지하철에 서서 생각했다. 세상은 무질서로 가득 차 있다고. 비집고 들어갈 틈 하나 없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허점투성이라고 말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가까운 예를 들어 보면 회사가 있다. 회사엔 업무분장이라는 게 있지만 일과 일 사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틈이 존재한다. 신기한 건 세상 모든 인간이 나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틈들이 못 견디게 불편한데 다들 그걸 그때그때 이래저래 넘기며 일하고 있다. 이건 00팀 일 아닌가요? 이걸 저희 팀에서 하는 걸로 윗선에서 다 합의가 되신 건가요? 아무리 부장님이라도 타 부서에서 저희 팀 부장님을 거치지 않고 저에게 바로 일을 주시는 게 말이 되는 건가요? 나는 묻고 묻고 묻는데 그걸 듣는 사람들은 "얘 인생 피곤하게 사네"하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세상에 틈이 많다는 걸 가장 많이 느낀 건 소송을 할 때였다. 직접 부딪친 법의 세계는 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배운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학교에서 배울 땐 분명 소송만 하면 죄인은 벌을 받고 무고한 피해자는 손해를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런 '시스템'이라는 것이, '안전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현실을 보니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죄인을 벌하는 게 아니었다. 자기 앞에 놓인 서류 더미를 치우는 것뿐이었다. 그들도 직장인이니까. 고소장 송달을 잘못 한 법원 직원은 회사에서 사소한 실수 하나를 저지른 것에 불과했다. 그 소송이 미뤄짐으로 인해서 고소인이 받게 될 피해는 보상해줄 의무도 죄책감도 없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송달 비용을 다시 내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사무적인 말투에, 억울한 건 국민신문고에 신고하라는 무심함에 치를 떨었다.


세상은 정말이지 혼돈으로 가득 차 있다. 인류가 생긴 지는 수십만 년이 됐고 최근 몇 세기는 혁신적인 인류 문명의 발전이 있었다는데, 그 시간을 다 거친 이 지구에 아직도 구획하고 정의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라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학문이고 개발이라는 게 다 구획하고 정의하는 거 아닌가? 근데 거기에 미친듯이 매달린 결과가 이거라니. 엔트로피 법칙은 이렇게도 강력하구나. 수많은 사건이 있었고 그에 대한 반성으로 다듬고 다듬은 사회 시스템이나 법은 더 큰 무질서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무질서에 마냥 화만 나는 건 아니다. 난 계획 세우는 데 좀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네모반듯 건물과 한 발이라도 벗어나면 범법자라는 낙인을 찍을 듯 권위 있는 척하는 이 세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메울 틈은 얼마든지 있다. 그건 내가 할 일이 많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그때그때 임시로 일을 처리하는 회사에 매뉴얼을 만들어주고, 그게 필요한 이유를 납득시킬 것이다. 법원이 대충대충 일한다면 거기에 촘촘히 대응할 방법을 정리해서 무료로 배포할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규칙 안에 평온하도록 말이다.


무질서한 곳에 질서를 세우면 원칙이 된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원칙이라는 게 거기 있던 것처럼 생각하지만 완전무결한 원칙이라는 건 없다. 그것도 어느 인간의 머리에서 나와서 어느 순간 자리 잡았을 뿐이다.


사방이 꽉 막힌 지하철 안에서 나는 내 사명을 깨달았다. 지금은 이렇게 갇혀 있지만 나는 원칙을 만드는 사람이 될 거라고.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이게 내가 태어나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이 될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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