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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셜리 Jul 26. 2023

신도림역의 무법자

출근 시간 신도림역, 나는 여러 사람을 제치고 걷는다. 그러다 앞 사람의 발 뒤꿈치를 밟는 일이 유독 많다. 반대로 내가 밟히는 경우는 없는 걸 봤을 때, 남들은 남의 발 뒤꿈치를 밟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근데 나는 왜 이렇게 자주 밟지?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답이 나온다. 내가 걸음이 빨라서다. 그리고 빨리 걷는 게 남들을 배려하며 걷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수영장에서도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수영만큼 혼자 할 수 있는 운동도 없는데 꼭 앞 사람 발에 닿게 된다. 어떨 때는 멈춰야 할 곳에서 멈추지 못해 앞 사람을 옴팡지게 만져버리는 일도 생긴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지만 내가 나를 유심히 관찰해 보면 그러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도 않는 것 같다. 내게 중요한 건 앞 사람과 안 부딪히는 게 아니라 빨리 가는 거니까. 뒷 사람한테 걸리적거리지 않는 거니까. 빨리 가려는 마음이 마찰을 빚는다.


나는 늘 의아했다. 어떻게 사람들은 저렇게 천천히 걸을까. 바쁜 일도 없는 걸까. 나는 바쁜 일 없어도 빨리 걷게 되던데, 이게 정상 속도가 아닌 건가. 특별히 일이 있어서 발걸음을 재촉하는 게 아닌 이상, 사람들은 원래 저렇게 천천히 걷는구나. 사뭇 신기한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곤 한다. 그렇게 바쁘게 걷는 와중에도 말이다. 바쁜 건 내 발만이 아니다. 눈도, 머릿속도 난 늘 바쁘게 돌아간다.


수영장에서 새로운 영법을 배울 때마다 늘 '빠르게 하지 말고 천천히 해보라'라는 피드백을 들은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일 것이다. 자유형도 리듬을 타면서 천천히 한 팔 한 팔 글라이딩 해주고, 평영도 다리로 힘껏 차서 추진력 얻었으면 충분히 미끄러져 앞으로 나갈 시간을 가지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는 빨리 가보려고 발버둥을 친 거였는데 천천히 하라고? 의아한 마음을 품고 그대로 해보면 정말 훨씬 수월해졌다.


요즘 배우는 접영도 마찬가지. 백날 해도 안 되는 접영이 고민이었는데 옆 반으로 옮긴 뒤 새 강사님이 처음 해준 피드백이 천천히 더 깊이 내려갔다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수면에서 깔짝대기만 해서는 내려가질 않으니 올라오지도 않게 된다. 몸이 올라올 때 팔을 써야 수월하게 돌아가는데, 나는 바쁜 마음에 제대로 내려가지도 않고 팔로 물을 잡으니 몸이 올라올 틈이 없는 거다. 몸은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팔로만 헤치고 나가려니 힘든 거고. 그래서 시간을 충분히 두기로 하고 머리를 한껏 처박으며 저 밑까지 내려가봤다. 역시나 훨씬 편해진 동작. 내 수영을 가로막는 적은 내 바쁜 마음이었던 거다.


그리고 오늘 아침 출근길, 평소처럼 바삐 걸었는데 나보다 더 바쁜 사람이 내 가방을 치고 갔다. 그 사람은 얼마나 바쁜지 이리저리 교차되며 걷는 사람들 사이를 잘도 비집고 들어가며 조금씩 앞서나가고 있었다. 몇 사람을 살짝 치면서 가긴 했지만. 방향이 같은 사람 뒤에 서서 천천히 걸어가면 방향이 다른 사람들을 치거나 치이면서 걸어가지 않아도 될 텐데. 마찰 없이 스무스하게 출근할 수 있을 텐데.......


그럼 나도 천천히 걸어볼까 싶어졌다. 나야말로 천천히 걸으면 여기저기 치이지 않고  남들 발 밟는 민폐도 끼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천천히 앞 사람 속도에 맞춰 걸으니 앞 사람 발을 밟을 만큼 가까워지지 않은 채 걸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내가 나서서 이리저리 길을 개척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리저리 길을 만들며 가느라 부딪히며 걷지 않아도 되니 편했다. 빨리 가려는 마음 하나만 내려놨을 뿐인데 이렇게 스무스해지는구나. 그동안 내가 겪었던 마찰과 소음이 알고 보면 불필요한 것이었을 수 있겠구나.

  

이건 꽤 많은 일에 적용되는 원리 아닐까. 빨리 가려고 부산 떠는 나 자신만 가라앉혀도 세상은 한결 고요해진다. 마찰은 줄어들고 상처받을 일도 없어질 것이다. 순리대로 했을 뿐인데 술술 풀리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왠지 남들보다 삶의 난이도가 높은 것 같다고 느껴질 땐 속도를 낮춰보기로 했다. 세상의 속도에 맞추기만 해도 많은 일들이 해결될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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