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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셜리 Nov 26. 2023

내가 만든 책은 나를 닮아 있을까

또 한 번의 마감을 했다. 만들었던 책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두껍고 어려웠던 책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책을 손에 쥐고 나니 서점에서 만나는 여느 책들과 같이 평범해 보이기 그지 없었다. 이렇게 잘 마감하는 것을 목표로 4개월을 달려왔으면서도 이렇게 평범한 책을 만들려고 내가 그 고생을 했나 생각하니 살짝 허무해졌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하니, 그럼 모든 책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편집자 자신만 아는 고생, 비하인드 스토리를 숨기고 있겠구나 싶었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표지로 감싸진 책들은 '나는 원래 이런 모양이었어요' 하고 시치미를 떼지만, 알고 보면 지금과는 꽤 다른 모습의 '원고'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순수한 날것 그대로의 원고를 책이라는 상품으로 만든 편집자에게 책이란 각자만 느끼는 애틋함을 덕지덕지 묻히고 있는 결과물인 셈이다.

이런 생각은 어쩌면 건방진 것일 수도 있다. 책은 어쨌든 저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려는 것은 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일에 관한 것이다. 책은 저자 것이지만 책 만드는 일은 편집자의 일, 디자이너의 일, 마케터의 일이 될 수 있으니 각자가 각자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편집자로서 내 일의 결과물인 책에 대해 말을 해보자면, 각각의 책에는 나라는 편집자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자식에게서 자신과 닮은 구석을 발견하면 괜히 흐뭇함을 느끼는 부모의 마음처럼, 내가 많이 개입한 책일수록 애착이라는 것이 생겨서 그런 구석을 찾게 된다. 내가 만든 책은 분명히 나를 닮아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만든 책은 실제로 나를 조금이라도 닮아 있을까? 궁금해진 나는 내가 만든 책을 다시 유심히 보게 됐다. 책 만드는 법이야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알고 보면 편집자가 재량을 발휘할 구간은 충분히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책에서 나는 연표를 만들 것을 제안했고 각주는 부가 설명, 미주는 출처 표기로 나누었으며 책을 최대한 빨리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하지 않은 이미지는 전부 뺐다. 그 결과 600쪽이 넘는데 이미지라곤 8개밖에 안 들어가는 건조한 책이 되어버린 듯도 싶지만. 나는 자식을 키우는 부모처럼 '이건 이 책을 위한 일이야'라는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일을 했던 것 같다.

다른 편집자가 만들었다면 분명히 세부적인 모습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연표를 안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연표에 그림까지 추가해서 더 사고 싶은 책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고, 부가 설명은 최대한 본문에 녹여서 각주를 없앴을 수도 있다. 저작권 확인하는 데 좀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미지를 지금보다는 많이 넣어서 빼곡한 글자 사이에서 독자가 조금이나마 숨 돌릴 공간을 만들어줬을 수도 있다. 이건 지금 돌아보니 아쉬운 점이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책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했기에 지금 다시 하라고 해도 비슷한 판단을 내렸을 것 같다.


그 결과 만들어진 책을 보면 정말 나랑 닮은 듯도 싶다. 긴 문장을 가급적이면 배제하고 짧은 문장을 이어둔 것을 보면 직설적으로 말하는 나를 보는 듯하다. 저자 역시 단문을 선호하는 분이어서 이 스타일이 유지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이런 스타일 자체는 옳고 그름이 없다. 물론 방대한 양의 정보를 전하는 책인 만큼 미사여구 없이 짧은 문장을 사용하는 게 거의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적절한 미사여구를 섞어서 이런 책을 좀 더 감칠맛 나게 쓰는 저자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또, 나는 어려운 것을 쉽게 전하는 것이 편집자로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은 전문가가 주로 읽는 책이 될 것임을 알았지만 배경지식이 충분치 않은 사람들이 읽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는 요소는 추가했다. 실제로 '하드랜딩'이라는 단어가 생소해서 각주로 설명을 넣었는데 저자분은 이 정도는 누구나 아는 단어라고 하셔서 이것에 대해서도 고민을 꽤 했다. 하지만 여기저기 물어본 결과, 뉴스를 늘 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생소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하드랜딩이라는 단어의 설명은 유지했다. 그리고 A 다음에 B와 C가 나오는데 이게 왜 나왔는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많았다. 저자에게 물어보니 A, B, C는 그 앞에 오는 내용의 세 가지 예시였다. 그래서 그 구조를 보여주는 설명을 중간중간에 추가했다. 아마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설명 없이도 이 요소들이 나열되는 이유를 찰떡같이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책은 모르니까 읽는 것이다. 다 아는 사람이 읽고 찰떡같이 이해해주기를 바란다면 편집자가 할 일은 극도로 줄어들 것이다.


편집자는 이렇게 일하면서 이러저러한 판단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리고 편집자마다 그에 대한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그렇게 다른 판단의 총합인 책은 역시 조금씩 다른 모양을 띤다. 그래서 일하면서 이게 옳은가, 하고 고민할 때가 많지만 결국 나는 나만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편집장님께 여쭤보며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고 보면 내가 만든 모든 책들이 나를 닮아있을까 하는 질문의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당연히 닮았다. 그리고 나는 나를 조금씩 닮은 이 책들이 소중하다. 최고는 아닐지라도 내 최선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내가 만든 책을 보고 간결해서 좋다고 하고 누군가는 왜 이리 팍팍하냐고 할 것이다. 마치 나라는 사람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갈리듯이. 그래서 내가 편집자로서 할 수 있는 건 나만의 방식과 판단으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책에 녹여내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를 닮은 책들이 쌓이고 쌓이는 것이 나만의 보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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