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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 Sep 12. 2020

3.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그 껍데기가 뭐라고.

<정상가족> 하면 우리는 모두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부(아버지)와 모(어머니)가 모두 있는 4인 가족 형태. 주로 부모는 생존해 있고 함께 산다. 그 외의 가족형태를 대놓고 '비정상'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정상 가족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주 천편일률적이다.


중학생이던 시절, 나는 내가 한국사회의 “정상성”에 편입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주위 친한 친구들은 모두 부모와 함께 사는 4인 가족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정말로 모두가 4인이었다. 실제로 그들 가족의 행복 여부와는 상관없이 나는 조금 초라했다. 아빠와 별거한 엄마와 함께 살던 나는 올려줄 전세금이 없어 자주 이사했다. 어렸던 나는 스스로를 껍데기만 멀쩡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맞지 않는 가정 형태에, 화목하지도 못했고, 한부모 가정은 아니지만 한부모 가정과 다름없었다. 집도 없었고, 뉴스에 전세난이 보도될 때면 역시나 우리 집은 이사를 걱정했고, 전세금이 없어 그보다 작은 집, 낡은 집으로 이사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아빠는 내가 초등학생이 되던 해부터 엄마와 심하게 싸웠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크게 기울기 시작했고, 불행은 혼자 찾아오지 않았다. 아빠는 집을 판 돈으로 사기를 당했고, 돈이 부족해진 부모님의 싸움은 점점 거칠어져 갔다. 아빠는 화가 난다고 내가 소중히 하던 물건을 집어던졌다. 아직도 그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난다. 그때 한참 유행하던 책 시리즈인 <북극에서 살아남기>와 내가 원고지에 쓴 글짓기 숙제였다. 그 책은 구깃구깃하게 넘기기도 싫어서 한 장 한 장 소중히 넘기던 책이었고, 글짓기 숙제는 잘 쓴 거 같아 스스로도 뿌듯해 책상 위에 올려둔 것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기울어져 가던 가세와 그걸 체감해야 했던 경험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혼은 안 했지만 별거만 아주 오래 하며 합칠 생각이 없는 이상한 가족 형태를 이룬 나는 ‘정상가족’ 그 껍데기가 부럽고 버거웠다. 마음이 여린 중학생 시절의 나는 아빠가 뭐하시냐는 질문과 이사는 왜 하냐는 질문이 불편하고 불쾌했다. 그냥 아이처럼 마냥 해맑게 말하기에는 나는 이미 커버렸고, 나의 이야기를 감추고 싶었다. 그 질문들은 나의 가정사가 ‘평범하지 못함’을 상기시키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주로 거짓말을 하거나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왜들 이런 게 궁금한지 모르겠다고.


나는 어려서도 커서도 그 누구에게도 나의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지 못했다. 절친한 친구에게도, 전 애인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나의 이야기 전부를 하지 못했다. 상처 받을까 봐 두려웠고, 누군가가 이걸로 약점 잡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지금은 그저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비해 그때는 내 부모의 불화가 나의 흠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는 부모 모두와 함께 사는 척을 했고, 커서는 학비를 부담하는 부담감을 털어놓지 못했다. 집에 가면 여전히 전화로 아빠와 싸우는 엄마의 말소리를 들을 때마다 스트레스 받았지만 그걸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삼켰다.


모든 곳에서 다 떨어지고 아직 사회에 첫 발을 내딛지도 못했던 때, 설상가상으로 학자금 대출의 이자 거치기간이 지나 원금을 균등 상환해야 한다는 통보가 왔다. 아직 알바 말고는 제대로 된 직장이 없는데 학자금을 상환하라니... 한국장학재단에 전화도 해보고 상담도 받아봤지만 이제는 이자 거치기간이 끝나 원금을 균등 상환해야 한다고 했다. 저마다 인생의 무게가 있는 거라지만 내 인생의 무게는 왠지 잘못 측정된 것 같았다.


필명을 쓰는 지금도 주변인에게 이게 내 글이라고, 이게 사실 진짜 내 인생의 무게라고 보여줄 용기가 없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그 껍데기가 누군가에게는 이렇게나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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