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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찐빵 Feb 07. 2022

조금 더 후해지는 마음

모든 우연한 만남은 곧 인연의 시작

테두리가 선명한 편이다. 내가 그은 테두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 밖을 서성이거나 지나치는 사람들 사이의 경계는 명확하다. 테두리 안은 정성스레 살피고 돌보고 아끼고 그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끔 호기심을 가졌고, 종종 의미 없는 눈길이 오갔다. 


타인의 감정에 쉽게도 물들었기에 해를 거듭할수록 경계를 더 두껍게 덧칠했다. 주는 만큼 오지 않는 마음에 서운함을 느끼지 않도록. 마음에 생채기라도 날까봐 경계선을 꼼꼼히 칠하고 또 칠했다. 나 하나 챙기기도 힘든 세상에 내 사람들만 사랑하면 되는 거라 믿었지만 남의 소식에 심장이 쿵 떨어지거나 신나게 두근대는 날이면 우연과 인연을 떠올렸다. 


테두리 안은 왜 인연이라 여기고, 바깥은 왜 우연이기만 했을까. 스치는 우연과 단단하게 얽힌 인연 사이에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보면 결국 하나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의 저녁, 독서모임에서 들은 한 분의 이야기에 나는 열심히 테두리를 그어댄 손짓이 얼마나 소모적이었는지 인지했다. 당시 참여하던 독서모임은 5~7명의 소인원이 모였는데 그 분은 새로 참여하신 분이었다. “생각해보면, 대구 인구가 200만 명이 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같이 모일 수 있는 건 사실 엄청난 확률이에요.”라고 하셨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책을 매개로 많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이 얼마나 대단한 확률인지 그때는 짐작만 했었다. 그런데도 마음엔 꽤 강하게 닿았는지 그 분이 했던 말을 핸드폰 메모장에다 입력해뒀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흘려보낼 이야기는 아니었나 보다.




시간이 더 흘러 남이었던 사람이 내 테두리 안에 들어오기도 하고 평생 나갈 일 없다 여겼던 테두리 안의 사람이 안녕을 고하고 멀어지기도 했다. 학생 때가 아니면 마음 나눌 친구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일로 만난 사람과 결이 잘 맞아 기꺼이 경계선 안으로 들인 적도 있고, 이별이란 이름 아래 완전히 남이 되어 지워진 관계도 있다. 같은 동네에 살아서, 같은 학교를 다녀서처럼 비슷하단 이유로 가까워졌던 이들이 각자 삶을 향해 서로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흘어지고 또 모였다. 


나는 우연과 인연 그리고 엄청난 확률을 떠올렸다. 그저 스치는 거라 여겼던 모든 우연한 만남은 곧 인연의 시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 중에 그날, 그 시간, 그 공간에서 스칠 수 있음은 우연이기도하고 인연이기도 하다. 


그렇게 여기자 조금, 후해졌다. 테두리 밖의 사람들에게. 


정확히는 내가 그은 테두리는 나 하나를 두고 나머지를 다 포함할 수 있도록 그려야 맞겠다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남이고, 스치는 만남은 곧 인연이라 여기자 관계에 애를 쓸 필요도 타인이라고 선 밖에 두고 바라만 볼 필요도 없어졌다. 같은 곳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만 시간이 흘러 그저 스쳐간 사람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여기면 함께하는 지금이 어느 때보다 소중해진다. 아주 잠깐 만날 뿐이라도 좋은 인연으로 남기려고 한다. 


꽤 긴 시간이 흘러 무수한 인연을 붙잡고, 보내고, 스치고 나면 그때는 테두리 없이 나도, 남도 하나로 묶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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