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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 쓰는 기자 Dec 11. 2020

큰 쥐라고 불러서 미안해

이해란 감정의 성가심

유리장 안에 있는 프레리도그.

10월쯤엔가. 초가을의 추위가 매서웠던 어느 날 아이와 함께 집 근처 동물원을 찾았다. 전체 시설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담한 동물원이었다. 실내와 실외로 나뉘어 있었는데 우리는 쌀쌀한 날씨를 피해 실내로 들어갔다.


동물들은 자그마한 우리 안에 살고 있었다. 몸을 숨기거나 기어 들어갈 만한 엄폐물도 딱히 없어서 동물들의 사생활이 그대로 노출됐다. 동물과 관객 간의 간격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우리가 서 있는 곳과 그들 사이에는 유리벽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세간살이는 소박했다. 채식 동물들이 모여사는 우리에는 배춧잎 몇 장과 채 썬 당근, 시래기 비슷한 거, 물 종지 한 그릇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곳은 관객들이 왔을 때 잠시 머무는 장소이고, 진짜 집은 저 뒤에 따로 있을 있을 것 같았다.  


전체 구조는 이케아를 연상케 했다. 전구 하나를 사려해도 오만가지 가구를 다 봐야 하는 이케아 매장처럼 별 관심도 없는 자잘한 동물들을 다 거쳐야 우리가 보려고 마음먹었던 악어에게 당도할 수 있었다. 원래 그런 건지 코로나 때문인지, 안내 직원도 없었다.


동물들은 푹 젖은 빨래처럼 늘어져 있었다. 엉금엉금 기어야 할 거북이는 우둑허니 서 있었다. 방울뱀은 구석에서 몸을 둘둘 만채 고개를 처박았고, 악어는 죽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앵무새는 아무리 말을 걸어도 끝까지 과묵했다. 이럴 거면 동물 인형이 잔뜩 있는 토이저러스에나 갈걸. 후회할 뻔했다.


재밌는 녀석이 있었다. 덩치 큰 쥐 하나가 바닥을 끽끽 긁고 있었다. 양손을 분주히 교차하며 같은 행동을 하고 또 했다. 손톱 밑에서 비릿한 쇠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자기 손을 모종삽 마냥 오므리고 있다. 긁는 게 아니라 퍼내는 중이었나 보다.


물론 긁든 파든 달라질 건 없다. 바닥은 스테인리스다. 아무리 파내도 손에 걸리는 것이라고는 무심한 공기뿐이리라. 손톱이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다. 괜한 오기가 생겨서 언제까지 그러나 보자 했다. 5분 정도를 옆에 있었다. 깔려 있던 건초 더미가 주변으로 죄다 밀려나고 은색 바닥이 잔인하게 드러났다. 큰 쥐는 흰자 없는 까만 눈으로 나를 힐끗 바라볼 때도 앞발질만은 멈추지 않았다.


웃긴 녀석이네 하고 넘길 수 있었지만, 궁금했다. 애는 왜 이러고 있을까. 땅굴을 파서 도망가려는 건가. 어디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유리창에 붙어 있는 이름을 읽었다. 프레리도그. 내가 큰 쥐라고 부른 녀석의 이름은 프레리도그였다. 도그이니 개과 구나 싶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쥐과가 맞았다. 정확히는 쥐목 다람쥐 과다. 이름에 도그가 붙은 건 울음소리가 개 짖는 소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원래 사는 곳은 여기가 아니고 아메리카 대륙이다. 해발 2,200미터 지역의 바위 없는 땅에 굴을 파서 그 안에 먹이 창고와 잠자는 방, 화장실을 만든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순간 그날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누군가를 이해한 다는 것은 참 성가신 일이다. 이해하면 마음이 쓰인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상대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좋으면 나도 좋다. 이해라는 감정은 종도 뛰어 넘나 보다.


프레리도그에게 괜히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그를 아메리카 대륙에서 데려오지도, 유리장 안에 두지도 않은 내가 그 앞발질만큼이나 의미 없는 사과를 하게 된다. 큰 쥐라고 불러서 미안해 프레리도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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