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추나무집손녀 May 30. 2021

퇴사할게요

너와 나 이제는 다신 보지 말아요

지옥 같은 주말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내 불안하고 힘든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어 

네이버 검색 창에 '코로나 시국 퇴사', '퇴사 후회', '이직', '우울증' 등을 두드려보다가 네이버 익스퍼트라는 처음 보는 서비스에서 '상담'이라는 것을 찾아냈다.

정말 우연히 찾아낸 것인데, 가족들에게 다 털어놓을 수 없는 말을 얼굴도 모르는 상담사에게 이야기나 한번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고, 또 지금 나는 혼자 있으면 심장이 터져 죽어버릴 것 같은 마음도 들어 용기를 내어 심리 상담사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마음이 어떠세요?'

라고 다정하게 묻는 상담 선생님의 목소리에 마음이 탁 풀려 지금까지 있었던 많은 일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며 퇴사를 결정해야 하는데 이후에 올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한 불안함도 크다고 말하다, 엄마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그만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지금 이 나이를 먹고, 결혼도 아직 안 하고 번아웃 같은 게 와서 회사도 관두고 걱정을 끼친다는 게... 너무 죄송하고 미안한 일이지 않느냐고.

그래서 더 버티고 참아낸 건데 도저히 안될 것 같다고.


"선생님은 지금까지 충분히 잘 견뎌오셨어요. 그리고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한 번에 겪어오신 게 정말 대단해요. 누구라도 그렇게 갑자기 많은 스트레스와 일들을 겪는다면 지치고 무기력해질 수 밖엔 없을 거예요.

이렇게 힘들 때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려고 용기를 내신 것. 그리고 본인의 상태를 스스로 판단하고 본인을 위해 결정을 내리고자 하심은 정말 선생님 스스로가 강한 분이라는 증거예요. 

가족에 대해 미안한 맘도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가족들은 선생님이 불행하게 견디는 것보다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으실까요?

저는 경제적인 문제가 크게 없으시다면, 더 힘들어지시기 전에 빨리 그곳을 나오시는 걸 추천드리고 싶어요. 회사 내부 사정은 모르지만,  제삼자인 제가 봐도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곳은 아니네요"


상담 선생님의 그 말에 큰 위안을 얻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사람이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코로나 시국이라 걱정이 되지만, 코로나가 대수냐 내가 먼저 살고 보자.

일단 가출한 내 영혼과 돌아오지 않는 식욕, 그 밖의 스트레스성 알레르기와 저혈압 등에서 탈출하기 위해선 퇴사만이 답이라는 결론이었다.



월요일. 출근해서 바로 대표실로 직행했다.

무덤덤하게 나를 바라보는 대표에게 '당신이 준 생각해볼 시간이 5일이나 남았지만, 

나를 위해선 빠른 퇴사가 좋을 것 같다고, 너무 힘들어서 심리 상담까지 받았고 

정말 마음 같아선 이번 주까지만 하고 싶다고' 전달했다. 


회사의 다른 문제점들은 말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떠날 마당에 문제점들을 말해주어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지도 않았고, 어차피 말을 길게 섞고 싶지도 않았다.

극강의 수인 '심리상담'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은 더 이상 나를 잡지 못하게 해 줄, 

상담 선생님이 준 '팁'이기도 했다. 


대표는 '심. 리. 상. 담'이라는 단어에 살짝 충격을 받은 것 같았지만 알겠다며 나름 쿨한 인정을 시작으로 

내가 극히 예민하고, 약하며, 그렇게까지 힘들게 일을 해서는 안된다며 나에게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일은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지 일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나 뭐라나...


아니 나도 알죠, 근데 불행할 만큼 업무 폭격에
팀원들 괴롭히라고 종용한 건 당신이잖아요. 
내가 조금이나마 발버둥 쳐보겠다고 도와달라고 한 것들도 다 외면해놓고선
무슨 쉰 소리세요....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이게 다 '가스 라이팅'의 일종이었다는 걸.. 나는 퇴사 후에 알았다.

회사 내 가스 라이팅이란 걸 처음 겪어봤던 나는 그게 가스 라이팅인 줄도 모른 채 1년 반을 무방비 속에서 

조금씩 가스라이팅에 무뎌져 있었고,

 사람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고 나름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나에게 그게 아주 잘 먹혔던 것도...


길고도 말도 안 되는 대표의 연설을 듣고 내 자리로 돌아와 나는 내 퇴사일이 결정되기만을 기다렸다.

분주하게 대표실로 들어가는 이사들의 모습을 보며, 퇴사일이 빨리 결정되기를 2~3주 정도만 참아내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그런데... 내 바람과는 무관하게 또 황당한 일은 일어났다. 


'심리상담'이라는 단어에 놀란 대표가 내가 한 말 '저는 마음 같아선 이번 주 까지만 하고 싶어요'에 꽂혀서

 내 퇴사일을 그 주 금요일로 잡아버린 것.

이사들은 그 결정을 듣고 그저 OK. 하지만 나에게 할당된 그 많은 업무들을 감당해낼 재간도 없으니 내 업무를 덜어줄 우리 팀원에게 나보다 먼저 내 퇴사일을 말하며, 

업무 다 해낼 수 있겠냐고 먼저 면담을 해버린 것이었다.


팀원은 너무 놀라고 화가 났는지 다이어리를 책상에 던져버리고 나가버리고, 

팀원의 돌발 행동에 놀란 이사가 나에게 다급하게 다가와 자기가 그 팀원에게 내 퇴사일을 이야기했고

 이런저런 업무 이야기를 했다며...

똥은 다 싸놓고 나한테 다시 정리하라고...

그러면서 마치 나에게 책임감 없는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데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내가... 이번 주까지 한다고 했니.... 인수인계하고 2~3주는 있으려고 했어... 

그게 기본이고 경력자의 소양이지.

그런데 대표나 이사라는 사람들이나... 일처리를 왜 이렇게 하는 거야.

마지막까지 꼭 그래야만 하냐.. 너네 진짜.. 어른들이라며....



화도 나고 기운도 빠지고, 헛웃음도 나는 나 자신을 부여잡고 팀원들을 불러 내 퇴사일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짧게 브리핑하며 소위 어른들이라는 분들이 뿌린 똥을 물걸레로 청소해가며,  

돌발행동으로 씩씩대고 있는 팀원의 마음을 달래고 상황 설명을 하면서

 내 자신이 왜 이렇게 처량하고 한심하던지.

그러면서도 참 슬퍼졌다.


이렇게 일주일 만에 퇴사할 수 있는 쉬운 자리였다면, 내가 버티고 참을 이유가 없었잖은가. 

나는 지금까지 뭘했던걸까.

화가 점점 증폭되고 이해도 되지 않았다.  왜 일을 이렇게 처리하는 거지?


대표의 방에 다시 찾아갔다. 

"제 퇴사일이 이번 주 금요일이라면서요?"라고 묻는 나에게 "네가 이번 주까지만 하고 싶다며"

라고 답하는 그의 생뚱맞은 얼굴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하. 인간....


인수인계도 하고 2~3주는 기본적으로 일을 하려고 했지만, 대표님이 그렇게 정했으니 나는 가겠다며, 

퇴사 당사자인 나한테 먼저 이야기를 했어야지 누구한테 내 퇴사일을 전달하느냐고 할 말을 다 하고 대표실을 나오는데 내 속이 아주 조금 아주 조금 시원해졌다.


아. 정말 비정상적인 곳이었구나.  어쨌든 탈출이야.


며칠만 참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하지만 퇴사로 모든 것이 해결되기엔 내가 너무 많이 황폐해져 있었다는 걸, 그땐 알 수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꼰대와 사원의 사이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