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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추나무집손녀 Jun 28. 2021

그날이 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퇴사일의 기억

대망의 퇴사일이 돌아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며, 참고 참다 보니 정말 이 날이 오고야 말았구나.

사실 별로 격정적일 것도, 그렇게 신날 것도 없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회사로 향하는 길이 다른 날과는 다르게 편하게 느껴졌을 뿐.

이제 다시는 그쪽으로 아침 일찍 걷는 일은 없을 것이고, 모닝커피를 살 일도, 보안 카드를 찍는 일도 없을 것이다.

내 나름의 손 때가 묻은 사무실 곳곳도 이젠 안녕.

아무도 밥을 주지 않아 아사 직전의 거북이들도 죽든지 말든지, 이젠 내 손을 떠나겠지.

(신경도 안쓸 거북이는 왜 사서 버리지도 못하고 사무실에 놓아두고 직원들을 괴롭히는지. 그건 정말 입사하면서 퇴사할 때까지 미스터리로 남았다.)



혼자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있다 보니 그리고 인수인계할 것이 없다 보니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났다.

퇴사일을 앞두고도 무던히도 업무로 달렸고, 인수인계가 따로 없을 정도 혹은 인수인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일은 광범위하게 흩뿌려져 있었으니까 달리 인수인계라고 할 것도, 그리고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으니 그들이 내게 인수인계서를 요구할 권리도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급하다고 하는 모든 업무들은 내 책임 꺼 다했기에 더 손댈 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너무 광범위하게 뻗어있던 내 업무는 실무보다는 모든 것을 껴안고 책임지고 상사로부터 깨지는 일종의 욕받이이자 컨트롤러 그리고 팀원들의 방패막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팀장의 역할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들 하던데, 그럼 팀장은 팀장으로서 어떤 면을 갈고닦으며 성장해나갈 수 있는 것일까.


좋은 선배를 만나서, 좋은 팀장과 선임으로써의 역할을 배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윗선의 요구로 팀원들의 목줄을 잡아당기며 그렇게밖엔 할 수 없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아끼고 응원해주며 함께 성장하는 그런 곳에서 일했다면 나는 어떤 팀장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누군가의 책임감을 이용해 먹는 여우 같은 사람에게 갉아먹히는 환경이 아닌, 책임감 자체를 높이 사주고 더 많은 기회와 발판으로 만들어주는 곳이었다면...?


그럼에도...  스타트업이라 부진한 매출로 시작했던 회사를 이만큼 성장시킨 내 노력의 땀이 서린 회사.

서운하면서도 아쉽고, 내 나름대로 최선으로 갈고닦은 그곳의 이 부분 저 부분을 살펴보다가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나는 공을 들였을까. 이렇게 떠날 회사였는데 왜 뼈를 깎을 만큼 애정을 쏟았을까. 이게 애정이 맞을까. 책임감 그리고 나 스스로를 위한 것은 아니었나. 나는 무엇을 위해 달렸던가.' 하는...   



점심에 짬을 내 그래도 이런저런 고생을 함께한 이사님과 커피 타임을 가졌다.

사실 별로 할 말은 없었다.

입사 초부터 가깝게 지냈지만 퇴사를 앞둔 몇 달은 글쎄... 일단 내 코가 석자였고, 그녀가 어드바이스로 건넨 '무조건 참아, 퇴사하면 지는 거야'라는 그녀의 말이 별로 와닿지 않았었기 때문에 자꾸만 그녀를 보면 저 사람의 눈에는 내가 패배자로 보일까?라는 생각이 들어  크게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의 말이란, 이토록 무섭다.


내가 너무 지쳤을 때 대표에게 내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려준 그녀에게 고마움도 크고, 내가 다리를 다쳤을 때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던 내 상태를 먼저 다가와 챙겨준 것도 이사님인데.

내가 너무 모질었나. 내가 너무 차가웠나.. 지금 돌이켜보면 또 미안한 마음이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짠할 정도로 자신을 '노예'라고 농담처럼 지칭하며, 퇴사하는 나를 두고 '어차피 떠날 사람은 떠나게 되어있는 것이라며' 자뭇 남아있는 스스로를 위안하듯 혹은 퇴사하는 나를 살짝 원망하듯 아리송한 뉘앙스를 풍기던 그녀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회사 생활을 참아낸다고 했다.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다.  나에게도 뭔가 목표가 있었다면 참을만했을까?


근데.... 목표가 있었더라도 나는 그녀가 아니니까. 그녀는 내 위치가 아니니까... 다른 문제다.

그녀는 이사, 실무는 하지 않는다.

나는 실장. 팀장이자 실무자 그리고 각종 마케팅과 촬영, 콘텐츠를 모두 껴안았다.

하나라도 내려놓으려고 했으나 절대 절대 안 된다고만 했다. 누가? 월급을 주는 사람이.


결국 돌고 돌아 드는 생각은 결국 우리 모두는 각자의 위치에서 밖에는 생각하고 결정할 수밖에 없는 것.


결국, 내가 아닌 타인은 모른다.

나는 목표가 있었더라도 이곳은 아니라고 결국은 결론 내렸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목표가 없이 이렇게 달려온 걸까.

갑자기 허탈해졌다.


그 이후는 기억나지 않는다.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가, 퇴사의 꿈을 안은 동료와 옥상에 올라가 대화를 나눴고, 살짝 건강의 이상신호를 느껴 '아 진짜 관두는 건 신의 한 수다'라고 다시 한번 느꼈던 기억뿐이다.


대표와는 그 전날 이미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던 터라 마지막이 조용히 흘러가서 행복했달까.


6시 반.

정말 퇴근 / 퇴사 시간이다.


마지막 메일을 전체적으로 남기고 (사실 정말 엿같은 몇몇은 리스트에서 삭제했다. 미안하지만 그들에겐 마지막 메일도 사치라고 생각했다), 상사들에게 마지막으로 깍듯하게 인사했다.


PPT 프린트에 자를 대고 난리를 친 그분께는 간략하게 인사만 하고, 인간의 정을 나누었던 상사들과는 꽤 오래 정답게 인사를 나누었다.

팀원들과도 인사를 나누었고, 가장 고마웠던 것은 타 팀 친구들이 앞까지 배웅해준 것. 물론 우리 팀원들도 배웅해주었지만, 퇴사한 지금까지 연락하는 것은 타 팀 친구들이니....

나는... 우리 팀원들에게는 매정했고 타 팀원들에게는 다정했던 나쁜 팀장이었을까...

나는 그들에게 최선을 다했는데, 표현하지 않아서 생색내지 않아서 그들은 몰랐을까.


예전에 대표가 그런 말을 했었다.

'너, 이렇게까지 하는 거 너네 팀 애들은 몰라! 그러니까 티를 좀 내. 네가 아무리 이래도 너네 팀 애들은 나중에 힘들면 니 탓말 할걸?!'

글쎄, 그게 정말 일지는 모를 일이다만

참.. 씁쓸하고 아리송한, 하지만 나도 나 자신을 되돌아볼 일이다.



노을 지는 골목을 걸어 나오며 증명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날을 기념하고 싶기도 했고, 새로운 회사를 지원하기 위해 미리 사진을 찍어두고자 함이었다.(성격도 급해)

사진사 아저씨의 평범하지만 다정한 목소리에 긴장이 확 풀렸다.


이젠 그 지옥같이 답답한, 공사장같이 시끄러운 그곳과는 안녕이다.


사진사 아저씨의 일상적인 친절에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감동을 받는 내가 좀 아련하다.

그동안 나는 어떤 세상에 있었던 걸까.


사진사 아저씨의 대화를 통해 살짝 온기를 되찾았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내 모습을 찾아가면 되겠구나.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조금 슬프고 우울하지만, 그럼에도 기쁜 나의 얼굴이 10장의 사진 속에 박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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