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잘못이 아니야.
이직한 지 2달 차.
새로운 회사는 적응한 듯하지 않은 듯, 여전히 낯설고 살짝 익숙해졌다.
전 회사에게 선물 받은 길고 괴로웠던 번아웃과 무기력, 그에 따른 우울감이 새로운 곳으로 이직을 하면 날아갈 거라고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나.
가끔씩 불쑥불쑥 생각지도 못한 순간 예민함과 우울함이 욱! 하고 나를 놀라게 한다.
오늘은 아침 일찍 눈이 떠져, 유튜브로 법륜스님의 주옥같은 명강의를 1시간 내리 들었으나... 별로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냥 기분이 처질 뿐이다. 생각이 많아지고 앞으로의 나날들과 재미없는 삶에 대한 재미없는 고민들이 내 머릿속을 괴롭혔다.
삶이 재미없어진 건 전 직장을 퇴사하고 회사라는 사회생활에 회의감과 나라는 한 사람이 단지 기계의 '부속품'이자 '대용품'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나서다.
나이는 왜 이렇게 많이 먹었는지 팔팔한 대학생들과 20대 직장인들을 보면, 아 너희는 정말 기회가 무궁무진하구나 하는 꼰대 같은 생각도 함께 하기 시작했다.
정말 생각하는 것도 재미없지 않은가.
역시나 전 직장에서 선물해준 새치(새치가 없던 나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로 새치를 안겨주다니... 대단한 H사다.) 염색을 어제 하고 난 터라, 신경 써서 머리를 감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으며 집을 나선다.
오늘의 우울감은 조금 무거운 것이 주말엔 진짜 '약'이란 걸 타서 먹어야 하나 잠깐 생각하다 오늘은 '상담'이란 것을 하는 첫날이라 그에 관한 기대감이 살짝 느껴져 그나마 안심이 된다.
(한참 무기력했던 때, 이마트에서 장을 보다 우연히 알게 된 '동부여성발전센터'에서 제안해준 컨설팅 상담인데, 전문가로 활동하시는 20년 경력의 선생님과의 상담이라 지금과 같은 오락가락한 내 상태에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신청해보았다.)
다자이 오사무의 염세주의적 글을 읽으며 회사에 출근에 우울함을 누르고 가까스로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외삼촌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가 어린이 날이었는데 잘 보냈냐고, 요새 새로 간 회사는 어떠냐고.
'괜찮.. 아요...'라고 뱉는 순간 눈에서 물이 터져 나온다.
이상하다. 퇴사하고 난 후부터 큰외삼촌에게 전화만 오면 이상하게 눈물이 터진다.
뭐라고 혼내신 것도 없고, 잘했다고 오냐오냐하지도 않는 무뚝뚝한 사투리에 살짝 정이 묻어나는 삼촌의 목소리인데 왜 눈물이 터지냐 이 말이다.
회사에서 근무 중인데 코가 빨개지도록 눈에 물기 고여서 가까스로 화장실에 가 아닌 척 안경으로 얼굴을 가려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업무에 집중.
이런저런 잡다한 회사 사람들의 말들에 귀를 막는다. 필요 없는 수다가 섞여있기도 하고, 그냥 스트레스가 될까 싶어 미리 방어하는 것이기도 하다.
스트레스에 취약해져 버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귀를 막고 할 일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오늘은 가까스로 잘 버티고 견뎠다.
서둘러 컨설팅 장소로 퇴근하고 가는 길. 아침의 우울감이 사라지고 또 나름 상쾌한 기분이다.
오락가락.
드디어 상담 선생님과 만나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떻게 컨설팅에 지원하게 되었는지 질문을 받으며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동부여성센터에서 나의 이력서와 관련 정보를 미리 듣고 오신 터라, 전 직장과 그 전 직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부분이 힘들었는지 그 이후의 시간들은 어땠는지 술술 이야기가 풀렸다.
20년 동안 커리어 컨설팅과 현직 대기업과 경찰대 면접관으로도 일하고 계신 선생님은 그동안의 내 이야기들을 다 들으시고는 말씀하셨다.
"패션 회사에서 많은 분들을 만나다 보면 정말 개성도 강하고 자유로운 분들을 만나죠. 거기서 10명 중 1명, 30명 중 1명 꼭 이상한 분이 있어요. 그리고 그 이상한 사람이 그 외 많은 사람들을 망쳐놓고 병들게 하죠.
그들은 자신이 과거에 받은 상처와 괴로웠던 기억을 스스로 소화하지 못하고 자신을 학대했던 사람들을 그대로 닮고 받아들여,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것을 똑같이 분출해내곤 해요.
그리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겪어요. 그리고 그 이상한 1명을 또 닮아가죠.
진짜 아픈 사람들은 그 1명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더 아파하는 거예요.
선생님도 지금 그런 상태예요. 나쁜 사람에게 마음이 많이 망가진 거예요. 계속되는 긴장과 불안에 트라우마도 짙어졌고요.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요? 지금 선생님은 우울증 초기 상태예요."
우울증 초기에 화병까지 나있다는데 속이 시원했다. 아닌 척 숨겨도 전문가에겐 들켜버렸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었다.
"회사라는 건 일종의 결혼과 같은 거예요. 하루 종일 한 울타리 속에서 함께 있잖아요. 내가 선택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거죠. 물론 돈을 벌기 위해 선택했지만... 선생님은 가족에게 지속적으로 상처 받고 힘들어했던 거예요.
그러니 마음이 크게 망가질 수밖에요.
괜찮아요. 다시 좋아질 수 있어요."
그리고 선생님의 연이은 한마디.
선생님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에요.
예민하다고요? 아니에요, 선생님 성격은 원래 이렇지 않아요.
망가졌고 상처 받았던 마음을 다시 말끔하게 치료하면 됩니다.
약 같은 것도 필요 없어요. 우리 열심히 노력해봐요!"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지금까지 계속 변해왔고 그렇게 변해온 지금의 내가 온전한 나인 줄만 알았는데.
그래서 재미도 없고 허무하고, 희망 같은 건 없지 않을까 했는데... 이건 내가 아니라고?
그냥 선생님은 담백하게 진실되게 던져준 한마디 일지 모르지만,
갑자기 뿌옇던 내 시야가 밝아짐을 느꼈다.
지금처럼 찌부러진 나는 내가 아닐 뿐, 이상하고 괴상한 사람들에게서 망가졌던 나를 다시 되돌리면 그뿐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힘이 났다.
우울하거나 뭔가 약해지고 힘이 빠진 사람에겐 이상하고 나쁜 사람들이 그 약한 틈을 발견하고 더 다가오기 마련이라며, 서둘러 그런 기운을 털어버리고 회복하고 다시 밝아지는 것,
집을 나간 현재 내 자아가 다시 온전히 나라는 인간에게 COME BACK HOME 할 수 있도록.
몇 주동 안의 상담 동안 잘해나가 보기로.
정말 힘이 되고 기운이 나는 1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아침과 저녁의 온도차가 이렇게 극명해도 되는 걸까.
상담이 끝나고 집에 오는 내내 생각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내 성격은 원래 이렇지 않았어'
그 한마디가 이렇게 힘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처방이 떨어졌다.
욕을 하면서도 할 수 있는 운동을 시작하기. 테니스, 복싱 등 펀치나 공을 날릴 수 있는 어떤 것이라도 시작할 것. 괜히 휴식을 취한답시고 독서, 영화보기만 하고 앉아있지 않을 것.
화와 스트레스를 분출할 수 있는 글을 적거나 그림을 그릴 것.
그리고 선생님이 내준 과제를 할 것.
앞으로 잘해보자.
무엇이 되었든 다시 내가 나를 찾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