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찾아간 그곳. 비겁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와 우연히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예정된 대화주제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태원의 그 골목은 지금 어떤 상태냐'라고, '세월호 이후 한국인들은 이런 재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느냐, 뭐가 달라졌느냐'라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는 외면하고 싶을 만큼 괴롭고도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아픈 상처이자 충격적인 기억이고, 그럼에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런데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며칠 전 본 기사의 제목, 참사 직후 매일 제사상을 차린다던 그 골목 가게 주인이 이제는 그곳을 떠났다는 것, 정도만 생각났다.
비겁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데, 나는 그 참사 이후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을 가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내 대답은 공허했고 더듬거렸던 것 같다.
2주가 지나도록 찜찜함이 가시질 않아 점심을 삼각김밥으로 때우고 이태원역 앞에 다녀왔다.
이태원역 1번 출구 표지판은 언제나처럼 서 있었다.
몇 걸음 떼지도 않아 바로 그 골목이 나왔다.
사진도 영상도 많이 봤지만 생각보다 좁았고,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폭은 2미터가 될까 말까? 이곳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감히 눈물이 나지는 않았는데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무섭진 않았지만 압도당했다. 이곳에서 스러져갔을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니 감히 심장이 뛴다는 게 미안했다.
예전 기사에선 오른쪽 벽에 희생자를 위한 포스트잇 메모가 가득하고 그 아래엔 빽빽하게 꽃다발이 놓여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찾을 수 없었다. 뭐라도 써붙여볼까 했는데, 새로 생긴 게시판이 눈에 띄었다. 지난해 1주기에 유가족 협의회와 시민대표단이 만든 빌보드라고 한다. 이 게시판은 이 참사의 골목을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라고 명명했다.
내용은 몇 달에 한 번씩 바뀌는 듯했다. 이 거리를 기억하고 희생자들의, 그리고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평온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한글뿐 아니라 영어, 이란어, 우즈벡어, 카자흐어, 스리랑카어 등...
상권은 예상대로 회복되지 않은 듯했다. 당일밤 찍힌 Youtube 영상에서 보였던 bar, 구멍가게, 수입제품 판매점 등은 모두 손님이 없었다. (바는 아마 낮이어서일까?) 모퉁이에 있던 수입의류+잡화 매장은 내가 20여 년 전 처음 이태원에 갔을 때부터 봤던 가게였다. 그 가게 사장님이 희생자를 위한 밥을 지어 골목에 내놓았다는 방송을 본 것 같은데 휴업 중이었다. PD 수첩에서 그 사장님 모습이 나왔던가. "애들 밥 한 끼 먹여 보내게 해 달라"라고 사정하고, 참사가 일어난 현장이다 보니 현장보전을 해야 하는 경찰관은 이를 말리고... 그러면서 경찰과 상인 모두 울었다던가.
직업상 이런 일이 일어나면 피하지 않고 내용을 파악해야 하는 편이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선 이런 일을 자세히 알아보는 노력을 하기 너무 힘들다. 큰 아이를 출산한 뒤 새벽 수유를 하다가 어느 지역 비닐하우스 안에서 초코파이 상자 안에 있던 영아가 숨졌더라, 는 기사를 읽고 한 30분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비겁하게도 외면했고 와보지 못했다.
피해자 한 명도 모르는 내가, 현장에 가보지도 않았던 내가 여기에 오는데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고 두렵고 힘들었는데 그 가족들은, 지인들은 어떨까 싶다. 우린 이 아픈 '기억'을 딛고 더욱 '안전'한 길을 걷게 될까.
잊지 않겠습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