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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스윗 May 15. 2021

일상은 사람을 재미없게 만든다

집안일 무능력자의 항변이자 푸념

올봄, 여초 커뮤니티에서 거론되던 중국 드라마 [겨우 서른]을 정주행 했다. 아이들 재우고 핸드폰으로, 1.5배속으로 겨우겨우. "겨우 서른이라니, 난 마흔인데!" 기분이 상하기도 했으나 어쨌든 여성들의 성장드라마라 꽤 재미있게 봤다.

세 명의 주인공 중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는 아마 아름답고 다재다능한 '구자'였을 테다. 남편이 대표로 있는 회사를 함께 설립했고, 일을 그만둔 뒤에도 실질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면서 표면적으로는 남편이 대표 역할을 하도록 서포트하며 기를 살려준다. 못하는 요리가 없으며 자녀 교육에도 열성이다. 예쁘고 안목이 높아 스타일이 좋은데, 성격까지 좋아서 친구들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사기 캐릭터다.


극 초반엔 당연히 구자에게 눈길이 갔다. “뭐야, 드라마라고 너무 완벽한 거 아냐?"코웃음은 쳤지만 정말 어딘가에 저런 사람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다른 주인공 '중 샤오친'이 눈에 들어왔다. 부모 도움으로 상해에서 안정적으로 성장했고 맞선으로 결혼한 인물인데, 드라마 초반부터 삐걱거리다 이혼 한 뒤 다시 일상과 남편의 소중함을 깨닫고 재결합하는 스토리를 펼친다. 이 커플 이야기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천위(전 남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 때문에 한 사람의 빛이 소모되어 버린다고.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이해가 돼."


대부분의 살림을 남편에게 맡기고 부잣집 고명딸처럼 생활했던 그녀가 이혼 후 처음으로 혼자 살림을 해보면서 하는 말이다.


맞다!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사람을 좀 먹는다! 나는 지금 드라마 타령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다.


나는 회사에선 제법 꼼꼼하게 일한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아, 혹시 나의 착각인가?!) 생활능력면에선 후한 점수를 받기 어렵지 싶다. 일단 청소와 정리를 잘 못 한다. 결혼 전까진 지방에 계시는 엄마가 가끔 올라오셔서 화장실 청소며 주방 재정비며, 어려운 집안일을 해결해주셨다. 계절이 바뀌면 옷 정리를 해야 하는데 한 번에 말끔하게 하질 못해 날이 더워지면 여름옷 무더기를 조금씩 헐어 옷을 꺼내 입다 추워지면 아직 정리가 안 돼 옷장이 걸려있던 긴팔 옷을 입는 식이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살림이 늘고 아이들이 생기니 이건 뭐 방법이 없다. 도와주는 분이 계시더라도 청소를 맡기는 건 가능하지만 청소 계획을 짠다던가, 물건들의 위치를 정한다던가, 버릴 물건을 정하는 건 오롯이 살림 주인 본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엔 블록 장난감이 문제였다. 첫째가 아기였을 땐 모든 것이 새 것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둘째가 생기니 몇 년간 장난감이 더러워졌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ㅋ오빠가 블록 쌓기 할 때마다 둘째가 옆에 엎드려서 뭐 한 조각이라도 입에 넣어보려고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아. 이 무섭고도 길고 긴 구강기여! 메가블럭, 레고 듀플로, 레고 오리지널, 맥포머스, 모빌로(독일 제품인데 얇고 단단하고 딸깍 체결하는 식이다.), 럭스 블록까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일단 제일 많이 손을 타는 메가블럭과 듀플로부터 세척해보기로 했다.


세탁망에 넣어 세탁기로 헹굼을 하면 된다느니, 식기세척기에 넣으면 된다느니 인터넷에 말이 많았지만 레고 코리아 홈페이지는 40도 이상의 물에 담그지 말 것, 과 세탁기나 식기세척기에 넣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래서 큰 목욕통에 주방용 베이킹소다와 약간의 세제를 풀고 반신욕 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우르르 욕조에 붓고 때를 불리는 건 간단했다. 다음엔 거품을 걷어내고 세척해야 하는데 수백 개를 언제 다 칫솔로 문질러? 내 팔은 두 개뿐인데? 잠시 고민하다 현실적으로 하나하나 문지르는 건 깔끔하게 포기했다. 몇 시간 걸려 반의 반 정도 하다가 그만둘게 뻔한데 아기가 어느 조각을 입으로 가져갈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므로. 무언가 입 쪽으로 가져가면 실시간으로 위생상태를 다시 확인하고 닦아주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말리는 것도 일이더라. 겹치지 않게 늘어놓고 두어 시간 뒤엔 뒤집어 줘야 블록 사이사이의 습기가 말랐다.

건조를 위해 테트리스 하는 기분으로 열심히 정리했다. 저것보다 더 많은 양이 대기중이라는게 함정.

반나절을 블록 위생에 투자한 뒤엔 냉장고에서 묵어가던 콩나물 한 봉지를 꺼내 콩나물 무침도 만들었다. ‘블록 세척에 밑반찬 요리라니, 완전 살림 9단 수준인데?’  


청소기 돌리기, 바닥 닦기, 세탁기+건조기 돌리기, 젖병 씻기, 이유식 만들기, 식기세척기 돌리기, 장난감 정리하기, 아이 책 정리하기 등 매일 기본적으로 반복하는 노동 외에 뭔가 추가로 더 한다는 건 나에게 대단한 일이다. (물론 저걸 나 혼자 하는 건 아니지만!) 우쭐한 기분이 든 것도 잠시, 어느새 나는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1호야, 엄마가 오늘 블록 목욕을 시켜줬는데 이거 하나하나 헹구느라 엄청 힘들었어. 화분의 흙이나 먼지 같은 건 닿지 않게 하고, 응?? 알아 들었어?? 앞으로 놀이터엔 절대 가지고 나가지 말자!!”


“2호야. 내가 너 때문에 이 블록들 다 목욕시켜줬어~ 네가 물건을 다 입으로 가져가니까 배탈 날까 봐. 알아듣고 있어?? 여보세요 까꿍? 엄마가 이거 하나하나 다 씻었어요~”


와. 생색 엄청 부렸네. 못났다.

 

저녁식사엔 큰 아이 식판에 콩나물 무침도 올렸다. 갓 무친 거라 역시 잘 먹는다 싶었는데 애가 잠깐 싱크대를 얼쩡거리는 사이 퍽! 소리가 났다. 콩나물 반찬을 더 먹고 싶어서 반찬통을 만지다 바닥에 떨어트리며 엎어버린 거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방금 무친 건데 왜 쏟았어? 이 거 콩나물 한 봉지인데... 더 먹고 싶으면 엄마한테 말하면 되지 왜 반찬통을 건드린 거야? 잘못했습니다 안 해?”


목소리는 높았고 말의 속도는 빨랐다. 한 봉지 고작 900원(오**스 쇼핑몰에선 무농약 콩나물 한 봉지를 900원에 판다.)짜리 콩나물 때문에 아이에게 언성을 높였다. 쪼그리고 앉아 바닥에 떨어진 콩나물 뭉치를 치우려니 짜증이 솟구쳤다. ‘그냥 반찬가게에서 살 걸 괜히 요리를 한다고. 오늘따라 참기름을 팍팍 쳤더니 더 미끌거리네.’ 생각하며 씩씩거리는데 등 뒤에서 아이가 작게 말했다.

“엄마, 근데 반찬통이 떨어지면서 제 발등을 조금 쳤어요. 많이는 아닌데 조-금 아팠어요.”


두꺼운 유리 반찬통이 떨어졌는데 아이에게 다치진 않았냐 한 번 물어보지 않았다니, 그제야 알았다. 내 몫의 청소 거리가 조금 늘었다는 사실이 엄마로서 기능하는 것 마저 멈추게 했구나. 내 몫의 일상 노동이 늘어날수록 짜증과 잔소리가 늘고 인내가 줄었으며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여유는 사라졌다. 그렇게 자질구레한 일들은 나를 참 별로인 사람으로 만든다.

바닥으로 엎어진 콩나물들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라니. 음식물 쓰레기를 모아놓은 비닐 봉지 속 처연한 콩나물 대가리들.

몸이 가벼워 살림 노동을 더 많이 맡았던 남편이 최근 바빠져 타격이 큰데, 내 살림력이 발전하질 않는다. 그래서 요즘엔 큰 아이에게 대놓고 부탁한다. “1호야. 엄마는 청소 정돈을 잘 못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네가 어지른 건 제발 네가 좀 치우자. 안 그럼 우리 집이 쓰레기통이 되고 나쁜 벌레들이 주인이 되고 말 거야! 세균이 2호 입속으로 들어갈지도 몰라. 그러면 우린 다함께 병원에 가야 할거야.”


아, 일상 노동의 지겨움과 괴로움이여. 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 지겨운 집안일을 하며 살아가는걸까. 1호 친구집은 모두 반들반들 윤이나고 예쁘던데 그 집 사람들은 다들 부지런한가봐. 복직을 한 뒤엔 그냥 돼지우리에서 살아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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