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첫가을’이라는 단어를 접했다. 내가 안 써 본 단어다. 상대적으로 긴 기간의 의미를 지닌 ‘초가을’과는 느낌이 다르다. ‘첫’이라는 관형사가, 단번의 새로움이라는 뉘앙스를 준다.
‘가을이 시작되는 첫머리’라는 뜻의 ‘첫가을’을 학수고대하는 때다. 연일 기후가 폭염과 열대야 일수를 경신하고 있어서다. 반갑지 않은 기록 경신.
요즘 더위 때문에 도서관을 자주 이용한다. ‘북캉스’(도서관 피서)를 실감 나게 즐기고 있다. 내가 다니는 ‘노원정보도서관’ 열람실 안은 늘 얇은 윗도리를 걸치고 있어야 할 정도로 서늘하다. 나는 벽 쪽에 붙어 있는 좌석을 선호한다. 유독 책상 공간이 안쪽으로 깊고 앞쪽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서 좋다.
이 좌석에 앉아 『끝내주는 맞춤법』이라는 책의 연습문제 답란을 연필로 써 채워가며 시간을 보낸다. 글을 쓰며 사전을 많이 뒤적이지만 얼마나 많이, 새로운 단어와 규칙을 접하는지 모른다. 잘못 알고 있는 것도 부지기수다. 문제를 풀고 정답을 맞춰 보고 수정을 하다 보면, 각각의 페이지는 마치 태풍이 지나간 논의 쓰러진 벼들처럼 황폐화된 모습이기 일쑤다. 그래도 글을 다루는 일에 피와 살이 되겠지 하는 마음에 몰두하게 된다.
나무들이 무성한 뒷동산은 눈[眼]이 쉬는 곳이다. ‘온수근린공원’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지만, 야산의 야트막한 언덕 같은 곳이고 호칭할 때의 예스러운 느낌이 좋아 나는 뒷동산이라 부른다. 무지막지하게 무더운 날 개울도 없는 이곳에서, 새들은 어디서 갈증을 해결하나 생각하던 참에 내 눈은 신기한 곳을 발견했다. 새집이면 딱 좋을 어느 나무 구멍 안에 샘물처럼 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 애써 품을 들인 것이 분명하다. 보지는 못했지만 인적이 드문 시간에 목을 축이러 오는 새들이 있을 것이다.
내 눈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창을 발견하기도 한다. 안쪽은 그림책이 가득한 어린이 열람실인데, 집 거실처럼 신 벗고 앉은뱅이책상에서 책을 읽어도 되고, 푹신한 창가 자리에 앉아 도서관 마당의 배롱나무를 내다볼 수도 있다. 때로는 폭우가 쏟아지거나 함박눈이 내릴 때 책을 내려놓고 그 광경을 감상할 수도 있겠다. 저 창은 유람선의 창이기도 해서, 창에 비치는 녹색 나무들은 푸른 바다가 비친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겠다. 아이러니하게도 폭염 때는 적운(뭉게구름)이 잘 만들어지는 때라 변화무쌍한 창공을 한없이 올려다볼 수도 있겠다. 가끔씩 나는 내 눈이 고맙다.
노원정보도서관엔 밀크커피 나오는 종이컵 자판기가 2층부터 4층까지 휴게실에 비치돼 있다. 80년대 중반 대학시절부터 애용한 구식 자판기. 한 잔 가격이 400원. 기호에 따라 밀크커피, 설탕커피, 블랙커피를 누름 버튼으로 선택할 수 있지만 카드 결제가 안 되는 이런 자판기를 오랫동안 잘 보지 못했다. 캔 음료나 생수를 파는 자판기가 대부분이다. 보름 전부터 이 도서관에서 10여 년 만에 종이컵 자판기의 밀크커피를 즐겨 마시고 있다. 달콤한 맛이 예전 그대로다. 기특하게도 컵에는 프랑스어로 ‘gout de ciel(천상의 맛)’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간식으로 먹으려고 30개들이 초코파이 상자를 집에 사다 놓았다. 올해 50주년 된 빨간색 포장지의 오리온 초코파이. 그걸 도서관에 가지고 와 밀크커피와 같이 먹기도 한다. 예스러운 것 두 가지가 궁합이 좋아 보인다.
나는 따뜻한 커피를 더 즐긴다. 선선해지거나 추워질 때는 더욱 그렇다. 처서인 어제, 태풍의 여진 덕분에 모처럼 시원한 하루를 보냈지만 가을의 하루는 아니었다. 아직 기미가 안 보이지만 첫가을이 와서 밀크커피와 초코파이를 이 도서관에서 맛보기를 기다려 본다. 그날은 도서관 피서가 파하는 날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