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특별시’ 전북 무주에 도착했다. 10월의 마지막 주말이다. 내가 속한 문학기행반은 잘 알려지지 않은 비평가 김환태(1909~1944)를 테마 작가로 선정해 무주기행을 진행했다.
김환태는 ‘한국 비평문학의 효시’라 불리는 인물이다. 1934년에서 1940년까지 순수문학 지향의 문학평론가로 크게 활동했다. “(문예비평가는) 순수히 작품 그것에서 얻은 인상과 감동을 충실히 표출하여야” 한다고 했다.
무주군 최북로에 ‘김환태문학관’이 있다. 그곳에서 김환태 에세이 <내 소년 시절과 소> 내용 일부와 이 작품을 형용화한 그림을 접할 수 있었다.
시내가 아침에 해도 겨우 기어오르는 병풍 같은 덕유산 준령에서 흘러나와 동리 앞 남산 기슭을 씻고 새벽달이 쉬어 넘는 강선대 밑에 휘돌아 나간다......어떤 날 나는 처음으로 풀을 뜯기러 소를 몰고 들로 나갔다. 소가 풀을 으득으득 뜯을 때 그 풀향기가 몹시 좋았다. 산그림자 속에 풍경 소리가 맑았다. 나는 해가 지는 줄을 몰랐다.
김환태는 무주의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자연을 벗 삼아 유년기를 보내며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다. 그는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비평가의 역할
작가론 내용을 잠시 언급하겠다.
김환태는 1928년 교토 도시샤 대학(예과 3년), 후쿠오카 규슈 제국대학(영문학과 3년)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학문이 문학”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광범위한 독서를 한 끝에 창작보다는 문학 이론에 관심을 돌렸고 결국 비평가가 되기에 이른다.
김환태에게 큰 영향을 준 영국 평론가 월터 페이터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인 가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술을 완성하고 향수하기 위해서 예술가와 독자(감상자) 쌍방이 의존해야 할 것은 각자의 주관밖에 없다고 피력했다.
여기서 ‘주관’은 감상, 인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환태는 비평가(감상자)가 작품을 읽고서 (작가의) ‘체험을 재구성’한 다음 자신의 인상을 중요하게 기록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인상주의 비평가로서 자리를 잡는다.
예술지상주의자
도시샤 대학 유학 시절 시인 정지용과 만난 일화는 유명하다. 정지용의 시 ‘향수’가 여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어떤 칠흙과 같이 깜깜한 그믐날 그(정지용)는 나를 상국사 뒤 끝 묘지로 데리고 가서 <향수>를 읊어주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이 노래는 나에게 그지없는 향수를 자아내 주었다.
그래서 그는 향수에 못 이겨 곧 하숙으로 돌아가기를 싫어하는 나를 데리고, 어떤 찻집으로 가서 칼피스를 사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권영민의 평론 <비평의 논리와 시적 감각-김환태와 정지용의 경우> 중에서
어려서부터 키워온 감수성과 대학에서 배운 것을 토대로 김환태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예술지상주의자이다. 남들이 나를 그렇게 부르거니와 나도 또한 그렇게 자처한다......나는 누구보다도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을 또한 무엇보다도 사랑하여, 인생에 대한 사랑과 예술에 대한 사랑을 융합시키고 생활과 실행의 정열을 문학과 결합시키려는 사람이다. 따라서 나는 문학의 인생에의 효용을 문학의 선동성, 계몽성에서가 아니라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그 기쁨 속에서 찾는다.
- <余는 예술지상주의자> 중에서
시인이나 소설가가 아닌 비평가가 이렇게 주장해 주어서 다행이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우수한 작품을 쓰는 데 집중하면 되고, 비평가는 그걸 알아주면 되기에. 그뿐 아니라 비평가는 여러 사람에게 전한다. 고 김현 평론가는 좋게 쓴 작품이 있으면 “네가 외롭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네가 힘들여서 쓴 글을 잘 읽고 좋아하는 독자가 있다는 것을 표현”했다고 한다. 비평 바로 그것이다.
진묘와 가묘
정미소가 들어선 김환태 생가 터를 들르고 묘소로 향했다.
김환태, 박봉자 부부의 묘는 세상에서 처음 보는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예술작품이다. 검고 흰 타원형의 납작한 평면 돌들이었다. 그 돌들이 크기를 줄여가며 교대로 쌓여져 있었다. 그런데 맨 위쪽의 돌은 제외하고 그 아래 돌들은 사방으로 틈새가 있었다. 조각돌들을 이어 붙였나 보다. 틈새가 있어 언제라도 돌을 깨고 망자가 환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진묘와 가묘였다. 왼쪽은 1944년 무주에서 작고한 김환태 비평가의 진묘. 크기가 조금 작은 오른쪽은 1988년 미국에서 작고한 박봉자 여사의 가묘. 박봉자 여사는 유학을 떠난 아들 딸과 함께 미국에서 살다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유족들이 여사의 유골을 고국에 모시는 것을 반대했다. 박 여사가 아들 딸과 오래 같이 사셨지만, 그보다는 고국(무주)에 대한 추억이 전혀 없는 2세대를 박 여사가 돌봐주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추억이 있는 후대들을 배려해 내린 결정이었다.
놀라운 것은 미국에도 진묘(박봉자 여사)와 가묘(김환태 비평가)가 있다는 것이다. 고국과 타국에 두 묘가 있는 경우도 처음 본다. 그렇다고 하나로 합칠 수도 없는 일이다. 합치면 안 될 운명이었나 보다. 두 분 다 ‘신여성’, ‘신남성’이었으니 저승에서 이해하셨으리라.
작품론
숙소 ‘태권도원’ 강의실에서 작품론 발표를 들었다.
1920년대와 비교해 1930년대는 다양한 문학적, 사상적 흐름이 혼재했던 ‘한국문학사의 황금기’였다.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모더니즘이 등장했고, 카프문학과의 이런저런 대결 양상이 첨예해졌다. 인쇄매체가 다양해져 비평의 장이 넓어졌고. 그래서 시인(김기림, 윤곤강 등)과 소설가(임순득)도 비평에 합류하던 시절이었다. 김환태는 에세이스트이기도 했지만 비평이 본업이었다.
비평가로서 김환태는 작품 분석을 거부하고 대신 심미성과 감동, 공감, 상상력을 중요시했다. “한 작품의 중심생명을 이해하려면 그 작품을 연애할 때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비평이란 감상이 좀 더 세련된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비평을 너무 어렵게만 여기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론을 발표한 문기봉 선배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서울문학기행’의 문화해설사로 활동 중에 있다. 2년 전 ‘워킹홀리데이’의 일원이 돼 무주에서 5개월 지내는 동안 김환태 비평가를 알게 됐다. 오랫동안 김환태 자료 수집을 해왔고 널리 알렸다.
그러다 놀랍게도 페이스북을 통해 미국에 사는 아들 김영진 선생과 연락이 닿았다. 80이 훌쩍 넘으셨다. 문 선배는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김환태 작가의 가족사도 알게 됐다.
김영진 선생에 따르면 어머니 박봉자 여사가 결혼 전 YWCA 일을 하셨는데, 그 일로 박정희 정권 때 신문을 받았다고 한다. 가족 모두가 평생 미국에서 살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3년 여동생 김인자 님과 함께 무주를 방문한 일, 관리 유지를 하지 않아도 되고 예술적이야 한다는 조건 하에 이루어진 부모 묘지 재건립 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비의 욕망
다음날 곤도라를 타고 올라가 덕유산 향적봉과 중봉을 다녀왔다. 무주는 사방이 운해로 덮여 있었다.
그 후 ‘눌인김환태문학기념비’를 찾아 갔다. 김환태의 호 ‘눌인’(訥人)은 어눌한 사람이라는 뜻인데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기념비는 1968년 김동리, 박두진, 이어령 등 문인 45명이 성금을 모아 완성됐다. 이 기념비 방문을 마지막으로 최초의 비평가 기행을 마쳤다.
끝으로 기념비에 새겨진 나비의 욕망, 김환태의 욕망을 소개하겠다.
나는 상징의 화원에 노는 한 마리 나비고자 한다
아폴로의 아이들이 가까스로 가꾸어
형형색색으로 곱게 피워논 꽃송이를 찾아
그 미(美)에 홈빡 취하면 족하다.
그러나 그때의 꿀이 한껏 아름다웠을 때에는
사라지기 쉬운 그 꿀을
말의 실마리로 엮어 놓으려는
안타까운 욕망을 가진다.
그리하여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소위 나의 비평이다.
(<평단 전망> 중에 들어 있는 글입니다.)
덧붙이는 말) 김환태 관련 책은 몇 권 되지 않는데 그 중 『김환태가 남긴 유산』을 권한다. 김환태의 1930년대 원고를 현대식 한글로 풀어 편집했기에 읽기가 수월하다. 위에서 인용한 글도 이 책에 다 있다. ‘김환태평론문학상’ 수상 평론들도 한데 모아져 있다.
덧붙이는 말 2)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했습니다. 제목은 "문학의 효용은 기쁨"... '나비' 꿈꿨던 김환태를 만나다 입니다.
무주 여행 관련 글) 구름과 하나 되다